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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미 Oct 16. 2020

우리 아이는 왜 말이 늦을까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

   아이와 함께 자주 다니던 지역 공동육아나눔터가 문을 다시 열었다. 코로나 확산세로 인해 오랫동안 휴관을 이어오다가 드디어 개관한 것이다. 언제 또 닫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일단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다. 기쁜 마음으로 아침 일찍부터 출근 도장을 찍었다. 익숙한 곳을 오랜만에 찾은 아이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밝아 보였다. 친구도 만나고 늘 갖고 놀던 장난감도 하나씩 건드려 보고 평소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 제가 보기에는요. 채훈이가 말을 아예 못하는 게 아니라 말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아요." 담당 선생님께서 오시더니 살며시 내게 말을 건네셨다. '말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나는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생님의 설명은 이랬다. 아이가 손가락을 가리키거나 '음! 음!' 소리를 내며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엄마에게 표현할 때 내가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원하는 것을 빨리 해결해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설명을 듣고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가 원하는 게 있을 때 바로 반응을 보이고 도와주는 것이 엄마의 역할 아닌가? 나는 아이의 욕구 충족을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걸까? 그리고 그게 아이의 말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걸까? 아이는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 언어 발달 단계에 아직 다다르지 못해서 하지 못하는 것 아니었나? 머릿속에 물음표들만 가득했다. 


   선생님은 차분하게 다시 말씀을 이어가셨다. 

"예를 들어, 아이가 선반 위에 있는 거북이 장난감을 갖고 놀고 싶은데 손이 닿지 않아 울거나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 어머니는 어떻게 하세요?" 

"음... 아이가 거북이 장난감을 만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장난감을 얼른 아이 손에 쥐어주겠죠."

"그것보다는 '채훈아, 이거 무슨 동물이야? (생각해 볼 시간을 주고) 거북이구나. 그치? 거.북.이 한번 해볼까? 채훈이가 거북이 장난감 갖고 놀고 싶었던 거야? '엄마, 거북이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되겠다.' 이런 식으로 아이에게 언어 자극을 주고 연습해 볼 기회를 주는 건 어떨까요? 물론 당연히 단시간에 이렇게 문장으로 말하지는 못하겠죠. 그러나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생겼을 때 어눌하겠지만 입을 떼어보려고 노력해보지 않을까요?"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의 감정은 그저 놀라움이었다. 내가 커다란 것을 놓쳤구나 하는 패배감 또는 당혹감보다는 그동안 몰랐던 것을 깨닫는 데서 오는 신선한 충격이라고 할까? 출산 후 2년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나의 육아 과정을 천천히 되짚어보게 되었다. 엄마로서의 나는 마치 고객의 불편을 최소화하고 고객 욕구 충족과 민원 해결을 위해 만전을 기하는 충성심 가득한 서비스업 종사자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아이가 저쪽 방에서 징징거리는 소리라도 들리면 거품묻은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부리나케 달려가 고장난 장난감을 금세 고쳐 주었고, 아이 먹이느라 밥때를 놓쳐 늦은 식사를 하다가도 아이가 책을 들고 와 읽어달라고 떼를 쓰면 곧바로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 안에 음식이 가득한 채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는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물론 집안일은 몇 배의 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마무리가 되었고 다 식어버린 밥과 국을 입에 넣는 게 맛있을 리 없겠지만, 현명한 엄마라면 으레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엄마의 일 쯤이야 잠시 미뤄둘 수 있는 '24시간 상시대기 모드'로 살았던 것이다. 나는 진짜 멋지고 대단한 엄마라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면서.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요구를 그때그때 받아주니 그 순간에는 스트레스를 적고 몸과 마음이 편안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를 스스로 해 보거나 말을 해 보려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뭔가 불편한 기미가 보이면 엄마가 재빠르게 달려와 해결사 역할을 해 주었으니 말이다. 부모가 너무 많이 안아주면 아이가 스스로 걸어볼 기회를 갖지 못해 걸음마가 늦어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바로바로 들어주는 데 길들여진 아이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으리라. 인내심과 끈기 대신에 원하는 게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짜증과 화가 마음 속에 조금씩 자리잡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선생님의 말이 모두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나의 부족한 면을 보아주고 나를 위해 진심을 담아 이야기해 줄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나는 내 스스로 보지 못했던 약한 부분을 마주하고 부족한 것을 채워나갈 용기를 얻게 되니까.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다음 달이면 두 돌이 되는 우리 아이는 엄마의 품을 조금씩 떠나 스스로 부딪쳐 보고 도전해 보고 싶은 시기가 온 것이다. 아이의 상황에 맞게 엄마가 조력자 역할을 해야 할 텐데, 아직도 마냥 아기라고 여기고 넘어질세라 엎어질세라 엄마가 비서처럼 모든 것을 즉각 챙겨주고 대신해준다면 과연 아이는 거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난 이제 아이에게 생각할 시간, 기다릴 시간, 혼자 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겠다. 엄마가 아이의 삶에 너무 많은 것들을 채우려 하고 엄마가 그 속에서 과한 역할을 했음을 쿨하게 인정하고, 이제 한 걸음 물러서고 싶다. 엄마는 배울 게 참 많다. 난 오늘도 이렇게 한 뼘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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