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하게 선한 쪽으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고

by 리다리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선 이야기였다.
p.292


요즘 '한계'를 많이 생각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의지를 갖고 죽을힘을 다해 (너무 뻔한데 너무 역설적이게도) 살고 있지만 어느 시점에는 내가 손대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날은 의외로 자주 와서 수시로 절망스럽다가도 특유의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겨나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니면 기댈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 떠나거나.

[대성당] 속 인물들도 자기 한계에 부딪쳐 허우적대고 있다. 갑자기 떠나버린 아내가 보고 싶어서, 아내와의 불화를 이겨내지 못해서, 중년의 외로움을 상기하느라, 언어적 소통이 불가능해서, 앞이 보이지 않아서, 아들이 상처받고 떠나서, 누가 선물을 도둑질해서, 취업이 안 돼서, 남편이 절망 중에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아서, 애인이 바람이 나서 그리고 아이가 죽어서.

귀는 닫혔고, 말은 막혔다. 분노의 대상을 잃어버리고 고통 속에 몸부림친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솟아날 수 없는 절망 중에 있다. 소통을 잃고 막막함으로 끝없이 추락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실마리는 '인식한다'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통해서 타인을 인식함이 나를 들여다보는 첫걸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전반적으로 답답함이 온 소설을 덮었지만 그래도 개별적인 사람을 엿본다. 행동과 말과 생각의 나열을 보면서 나를 비춰본다. 요즘 관계에 대해서 더 생각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어쩌면 나도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실수하고 상처 주고 다치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내가 먼저 상처받은 것처럼 더 크게 말하느라 귀가 잘린 사람처럼(<비타민>) 눈이 멀어버린 사람처럼(<대성당>) 행동했던 적은 없는지. 검은 안경과 지팡이가 당연히 있을 거라고 함부로 판단한 적은 없었는지. 진짜 소통은 눈을 감아야 시작되는데, 보이는 것을 말로 섣불리 내뱉기보다는 고요하게 손으로 따라 그려야 되는 것 같은데.(<대성당>)

내 마음조차 완전히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타인의 행동을 마치 내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가감 없이 단정하는 게(<굴레>) 내 본모습은 아니었을까 계속 생각했다.


소재를 사용해 불안을 표현하는데 카버는 천재적이다. 누구에게나 불안은 존재하는데 그것에 대처하는 저마다의 자세를 다양한 소재를 통해 드러내는 방식에 감탄했다. 이를테면 실직 후 소파와 한 몸이 돼가는 남편과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냉장고가 고장 나면서 증폭된다.(<보존>) (다 상해버리고 있는 음식과 흘러나온 냉매의 습격은 가관이다) 초행길에 말도 하나도 안 통하는 기차 안에서, 하필이면 칸막이 객실이라 더 답답한 와중에 앞자리에 발을 떡 하고 뻗친 채 잠든 외국인만 해도 불안한데 아들에게 주려고 산 지갑을 도둑맞았다는 걸 알게 되는 한 남자의 불안이라니! 점차로 커지는 불안에 아랑곳 않고 기차는 출발한다(<칸막이 객실>). 귀에 물이 찬 것처럼 뭔가 꽉 차 잘 안 들리는 상황에 아직은 보내고 싶지 않은 아내가 찾아오고 그가 귀를 뚫어주자 이제 '이혼하자'는 말을 대면해야 하는 남자의 불안(<신경 써서>),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집 안팎을 뛰어다니는 공작까지(<깃털들>). 특히, 의사가 계속 괜찮다고 하지만 아이가 죽을까 봐 불안해 집에도 못 다녀오는 부부 앞에 나타난 옆 병실의 환자. 억울하게 싸움에 휘말려 칼에 찔리고 결국 죽어 버린 아이를 보면서 그 불안은 현실이 되고 만다. 게다가 집으로 계속해서 의문의 전화가 걸려와 아들의 이름을 말한다. 부부는 거의 미쳐간다(<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 모든 불안과 충격들을 헤집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무엇으로 가능할까?

얼마 전에 '식탁의 마법'에 대해 생각했다. 스트레스 많이 받은 아이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때 끓여 냈던 김치찌개의 힘에 대해 글로 썼다. 상황은 잘 달라지지 않고 이미 일어난 일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때 간혹 음식은 위로가 된다. 하지만 따뜻한 빵보다 위로가 되는 것은 내가 느끼는 절망이 나 혼자만 느끼는 특수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나와 동시간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누군가에게 나에 필적하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에 있다. 그리고 형태는 다르지만 감히 무게를 재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눈이 절망에서 벗어 나오는 것을 앞당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대성당]의 표제작 <대성당>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으며 위로받았다. 언급한 소설들에서 문제적 주인공들은 타인의 상태를 온전히 인식하는 것에 한 발을 들이자마자 빠르게 회복되는 자아를 경험한다.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며 등장인물을 인식하는 것만 몰두하지 말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연습을 더 하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

아, 재밌다. 이 모든 과정이 즐겁다. 멋진 책을 만나 생각의 전반이 미세하게 '선(善)'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때가 근사할 만큼 짜릿해서 여전히 독서를 강행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는데, 어떤 책은 페스티벌 수준으로 잔뜩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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