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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Oct 16. 2020

독서로부터의 사색(死色)

좌충우돌 독서모임 입성기 2


K의 자기소개를 마지막으로 모두의 소개가 끝났다. 꽤 많은 사람의 소개를 듣지 못했지만 숨을 돌리며 주욱 살펴보았더니 거의 내공이 빵빵한 분들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이들 책 이외에는 거의 읽지 않았다.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을 말하라면 [한국 현대문학 단편집]과 [책 먹는 여우] 정도였다.


읽고 싶은 책을 추천해보라는 말에 다들 웃기만 했다. 그랬더니 칠판 앞에 계신 그 여유가 넘치던 신사 분이 종이 뭉치를 옆 사람에게 주었다. 그것은 도서 목록이었다. 알고 보니 목록을 준비하신 분은 독서회 경력이 많은 분이었고, 그 양옆으로 두 분도 다른 독서회에서 신생 독서회를 위해서 응원차 온 분이었다.

방식은 그랬다. 이미 사서 와 멘토가 1년 치 도서 목록을 뽑아 놓았더랬다. 첫 번째 책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한 달에 2번 진행되는 독서모임이기 때문에 다음다음 주까지 신영복의 책을 읽고 오면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신영복 선생님도 몰랐었다.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은 제법 두툼했다. 도서 앞표지 중앙 하단에 떡하니 박힌 바코드 스티커가 홀로그램처럼 빛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 눈이 빛났을 것이다. 식탁 위에 턱하니 올려놓으니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이 힐끗 보았다.

하지만 처음 마음과는 달리 나는 바빴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K랑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다가 집에 갔다. 그러면 아이들이 올 시간이거나 수업이 있었다. 어떤 날은 약속이 없어도 밀린 집안일을 하다 보면 수업하러 갈 시간이었다. 신발을 꿰 차고 나가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책은 잊혔다. K로부터 전화가 와서야 책이 생각났다. 오리엔테이션을 빼면 첫 번째 독서모임을 하기 삼일 전이었다.


"너 책 읽어봤니? 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야."


그날 밤 나는 다섯 장 정도 읽고 꾸벅꾸벅 조는 나를 발견했다. 내게 그 책은 3일에 끝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종이와 활자의 차이는 알겠는데 영 진도가 안 나갔다. 신영복 선생의 옥중서신인 거는 알겠는데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지... (나는 3년이 지나서야 이 책이 얼마나 중요한 책인지 알게 됐다. 거의 눈물을 쏟을 뻔했다)

결국 시간은 됐고, 나는 또 10분을 늦었다. 지지난 주에 봤던 멘토 두 분은 보이질 않았고, 상석의 남성만 말씀 중이었다.


"에,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실 일은 오늘 자유롭게 느낌 말씀하시고, 회장과 총무를 선출하는 일을 하셔야 합니다."


돌아가면서 독후감을 말하기로 했다. 회원은 15명 정도였는데 그중 반 이상이 책을 못 읽어왔다고 실토했다. 그중 어떤 분은 자기의 느낌과 간략한 책 소개를 서면으로 제출하신 분도 있었다.

총평 후에는 멘토가 너무 많은 시간은 할애해 이 책이 왜 좋은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는데 나는 좀 지루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책을 못 읽어와서 딴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멘토가 못마땅해 하는 게 느껴졌다.

어떤 사람은 책 얘기보다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는데 멘토의 미간은 계속해서 찌그러졌지만 나는 듣기가 좋았다. 사극을 현대극보다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공부하는 느낌이랄까. 특히, 내가 태어나기 전 대통령 이야기는 아주 재밌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처음 책에 대해 말하는 자리라 너무 떨렸다. 얼굴은 허옇고 말은 더듬댔다. 잘 들어보면 책 내용도 아니었다. 회원들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겨우 대여섯 장 읽고 왔기 때문에 중언부언하는 내가 너무 꼴불견이라 첫 시간보다 더 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색(思索)을 하고 싶었는데 사색(死色이) 됐다고나 할까.



그렇게 첫 번째 책에 대한 토론이 끝났다. 멘토는 우리에게 안녕을 고했다. 다음 주부터는 우리끼리 진행해야 한다면서 운영진을 뽑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건넸다. 속으로 나는 저렇게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는 멘토는 이제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방식은 제비뽑기였다. 아까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하던 회원이나 어딘가 중후한 멋을 뽐내던 남성분이 회장을 맡는 게 좋다고 생각했으나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제비가 낫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 제비를 누가 만들었을까? 나는 분명히 아니었고, 담당 사서였을까?

통이 돌았다. 나도 한 장 뽑아 들었다. 엄마야, 음험한 소리가 나왔다. K가 내 쪽지를 흘깃 봤다. 회장이었다.

내 생각에 회장이 되었으면 싶었던 분이 총무를 뽑았다. 나머지는 모두 빈 종이였다.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나는 자기도 무단횡단 하면서 자동차를 떡하니 저지하는 사람처럼 다소 무엄하게  한 손을 앞으로 쭉 펼쳐 손바닥을 보이면서 말했다.


"저는 지난주에 소개했다시피 여기가 뭐 하는지도 모르고 나왔어요. 그리고 저는 너무 어립니다. 다시 뽑았으면 좋겠어요."


어려도 좋아요, 더 괜찮아요, 무슨 소리예요 뽑았으면 해야죠, 자 여러분 박수.

누가 말하는지도 모르게 응원인지 떠넘기는 건지 덕담이 우수수 쏟아졌다.


"아, 그러면!! 제가 초, 초, 총무를 하면 어떨까요? 이정임선생님이 회장을 하시고요. 총무가 더 할 일 많은 거 아시죠? 제가 막내니까 잡다한 일 다 하겠습니다 여러분!"


마치 반장선거라도 나가듯이 외쳤다. 총무를 뽑으신 분과 회장 자리를 맞바꾸었다. 난색을 표하며 자리에 앉는 내게 K는 예의 그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그렇게 나는 독서모임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얼굴은 점점 사색이 되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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