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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Oct 16. 2020

죄송합니다, 잘못 왔어요

좌충우돌 독서모임 입성기 1


서른에 아이를 학교에 보낸 나는 주변에서도 독보적으로 젊은 엄마에 속했다. 학교에서 학부모로 만난 사람에게는 누구든 '언니'라고 부르면 됐을 정도. 큰 아이가 아홉 살이고 작은 아이가 여섯 살일 때 나는 오전의 꽤 많은 시간이 비어 있었다. 학교에서 '엄마의 독서교육'을 모집했고, 학교 도서관에 모여서 12주 동안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독서법에 대해서 강의를 들었다.


나는 그때 이미 논술 과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무도 당당하게 모집에 참여했다. 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아이들을 지도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고, 이미 고학년 이상만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저학년인 내 아이에게 어떤 책으로 지도할 수 있을지 고민이기도 했다. 나와 제일 친한 자모인 K를 설득해서 같이 간 모임이었다.


석 달의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잘 접하지 않았던 한국 동화들도 많이 알게 됐다. 권정생 선생님밖에 몰랐던 내게 이현주 작가나 서정오 작가를 알게 된 것도 쾌거였다. 그런데 삼 개월은 못내 아쉬웠다. 언니와 둘이 스터디를 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강제성이 없다 보니 흐지부지됐다.



우리 동네는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시립 도서관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는 많은 시립 도서관이 있지만 작은 축에 속한다. 그래도 아동열람실도 꽤 큰 편이고 성인 자료도 적지 않아서 종종 이용했다. 하지만 내 책은 전혀 빌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수업하는 중학생 아이들이 수행평가로 인문학서나 현대 소설 등을 읽어야 할 때 대신 빌려다 주거나 두 권을 빌려 같이 읽는 식으로만 활용했다.


어느 날 벽면 게시판에서 '성인 독서회 모집'이라는 공고를 보았다. 여름이 막 시작됐었나, 좀 덥다고 느꼈던 것 같다. K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하자고 했다. '성인'이라는 두 글자를 봤음에도 어린이 책을 읽는 모임인 줄 알았었다. K도 이미 '엄마의 독서교육'에서 선정된 책을 여러 권 사 두었기 때문에 흔쾌히 모임에 참여하기로 했다. 신청서도 내가 썼다. 인적 사항을 다 알 만큼 친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든 좀 늦는 못된 버릇이 있다. 그날도 좀 늦었다. K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부리나케 움직여 도착했을 때는 10분 정도 지났을 때였는데 이미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를 외치고 문 앞에 자리가 비었음에 감사하며 앉을 때는 이미 자기소개가 상당 부분 진행돼 있었다.


겨우 숨을 돌리고 제대로 둘러보니 어 이상한데? 우리처럼 젊은 엄마는 거의 없고 한눈에 봐도 45세 이상되는 분들이 태반이었고, 60세로 보이는 분도 계셨다. 자기소개도 잘 들어보면 열심히 읽어보고 싶다, 이런 모임을 기다렸다, 역사 책을 좋아한다 등등 무언가 모르게 나의 생각과는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는 듯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발갛게 된 볼이 채 식기도 전에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저는 ooo이라고 합니다. 우선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사실 여기가 성인 독서회인 줄 모르고 왔어요. 죄송합니다."


그때 스무 명 남짓한 회원들 가운데서도 단연 여유로워 보이는 데다가 가장 상석에, 그러니까 칠판 앞에 앉은 신사 분이,

"그럼 뭐인 줄 알고 왔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어린이 책 읽는 모임인 줄 알았다며 오늘은 즐겁게 있다가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K의 자기소개 차례가 되었다.


"저는 여기 옆에 동생 따라서 왔고요. 저도 잘 못 알고 왔는데 저는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거든요. 이왕 왔으니까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책상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듣다가 화들짝 놀라서 K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개구진 표정으로 웃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독서 모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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