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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Jan 07. 2022

마지막 등교를 앞두고

오늘 등교를 끝으로 아들은 중학생 신분이 끝난다. 세월이 지날수록 시간은 더 빠르다더니 그 말이 맞나 봐. 언제 3년을 훌쩍 보내고 졸업을 하는지. 그 애의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졸업을 맞기 위해 오늘은 마지막 등교를 하게 될 것이다. 기분이 어떨까. 아마도 아무 생각이 없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생각해 보니 난 셀러브레이션에 집착한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신년이면 달력과 공책이 함께 있는 스케줄러(일명 다이어리)를 사서 가족의 생일과 부모님 결혼기념일들을 먼저 표시했다. 요즘 애들 말로 다꾸라고 하는 것도 이미 90년대에도 다 했다. 색색의 펜을 사다가 그림을 그리고, 스티커도 적절하게 붙이곤 했다. 좋아하는 가수도 잡지에서 오려 붙이고, 시간표도 대문짝만 하게 써 두었다. 글씨가 엄청 예쁘진 않았어도 곧잘 둥글게 썼다. 꾸미기도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했다. 다 꾸며 놓은 칸들을 속속 채우는 근사함도 이미 오래전부터 경험해 봤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쓰고 있다. 내 책장 한편엔 왕년의 다이어리들이 줄 서 있다.



 올해의 스케줄러에는 예전에는 없던 중요한 날이 서너 개 늘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아이들의 졸업과 입학이다. 세 살 터울 남매라서 같은 연도에 졸업과 입학을 한다. 아들은 돌아오는 주 월요일이고, 딸은 2월이다. 맞는 날짜에 형광펜으로 박스를 치고 하미 졸업, 보미 졸업 적어두었다. 일찌감치 스케줄도 빼두었고.



 졸업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아이들은 잘 모를 것이다. 졸업은 무사하다는 것이다. 평범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을 잘 보내고 일련의 과정을 성실히 보낸 것에 대한 공인된 기관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건강했다는 것이다. 나에겐 이것이 사무치게 행복한 일인데 아이들은 별다른 감흥이 없다. 시간이 지났으니 하는 거고, 남들이 하는 거니까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 그니까 남들이 다 하는 걸 해내는 게 그게 힘든 거라니까.



 아들은 알까. 그 애가 보낸 3년이 엄마에겐 어땠는지. 거의 매일이 살얼음판을 위태롭게 건너는 기분이었다. 학교는 왜 가야 하는 거냐, 죽고 싶다, 공부 따위 해서 뭘 하냐, 어차피 난 해도 안되는데 왜 자꾸 하라고 하냐. 사춘기라 흔들리는 감정 상태로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에 엄마는 채찍으로 얻어맞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처음에는 요령이 없어서 그 말을 모두 주워섬기며 내 아이가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타인의 도움도 얻었고, 홀로 이겨내기도 하면서 얇고 건조하던 엄마의 마음은 결국 두껍고 단단해졌다. 인간이 이렇게 울음을 뽑아낼 수 있는가 자문하며 눈이 퉁퉁 붓도록 울던 날이 얼마큼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3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발 우리의 안녕이 깨어지지 않길 기도하면서 여기까지 견뎠다. 그러니 졸업을 앞둔 이 하루가 나에게 감격이 아닐 수가 없지. 아마 가족 중 그 누구도 내가 이토록 힘들었다는 걸 모를 것이다.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를 맞춰 우리는 신도시로 이사를 결정했다. 그곳에 가니 교복을 시에서 지원해 준다고 했다. 학교에서 지정해 준 교복 집으로 가서 치수를 재고 샘플 옷을 입어보았다. 키가 더 클 것을 대비해서 밑단을 길게 잡았고, 재킷도 넉넉한 품으로 주문하였다. 원래 살던 곳보다 신도시의 교복은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된 도시의 학교는 교복이 지정된 지 여러 해가 지나 좀 촌스러운 반면, 새로 만들어진 도시의 학교는 새로운 스타일의 교복을 지정했기 때문에 보다 세련됐다. 멋지게 등교할 아이를 더욱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전학을 결정했다.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전화기에 학교로 추정되는 유선전화번호가 찍힐 때마다 내 심장이 발바닥까지 추락하는 기분이었다는 걸 가족들 누구도 몰랐다. 어머니, 아이가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아이가 하루에 한 번 이상 보건실에 갑니다. 어머니, 친구들과 같이 하는 수행평가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아이가 수업시간에 자주 엎드립니다. 어머니, OO이 어머니께서 전화 통화를 원하십니다.



남의 집 아이들은 정말 즐겁게 학교생활하던데 우리 아이는 왜 이럴까, 아이에게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화를 내면 더 크게 성을 냈고, 결국은 서로 상처가 났다. 성인인 가족들에게는 내가 아이에게 쩔쩔맨다는 소리만 들었다. 내가 쩔쩔매고 있는 것은 당신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흉포한 관심 때문인 건 몰랐겠지. 쟤는 왜 또박 또박 말을 안 하니? 쟤는 우울증 있니? 쟤는 대화가 안 돼. 너는 왜 집에서 애 공부 안 가르치니? 어차피 공부 싫어하는데 학원 그만두는 게 어때? 쟤는 왜 이렇게 나약해? 네가 오냐오냐해서 그러는 거야.

 이런 따가운 소리들이 가슴을 휘휘 저었다. 애아빠가 엄마에게 못 되게 말한다고 소리를 벅벅 질러가며 아이를 혼낼 때 그것은 훈계가 아니라 네 감정의 분화 일뿐이라고, 엄마에게 못 되게 말하는 것은 나와 쟤의 관계니 신경을 끄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가장 상처받았다.



그렇게 지나온 유구한 세월이다. 고맙게도 우리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사를 결정해서 돌아오고 나니 아이가 거짓말처럼 좋아졌다. 아니, 그 사이에 내가 먼저 달라졌다. 모든 것을 내가 짊어지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힘쓰지 않아도 아이는 고향으로 돌아와 온 도시를 누비며 이곳저곳에서 기쁨을 찾았다. 신도시로 이사 가니 길도 모르고, 친구들도 없어서 자꾸만 방 안으로, 우울감 속으로 침잠하던 아이가 돌아오자마자 맑은 공기를 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모양의 자전거가 아이의 발이 되어 주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시간을 따로 보내며 희한한 존중 의식이 생겼다. 물론 한두 달에 한 번은 예전처럼 싸우기도 했다. 그래도 화해가 빨랐고, 서로 노력하는 게 물리적으로도 보였다. 나에게 그렇게 광명이 찾아오는가 했다.



문제는 고등학교 입학이었다. 담임선생님과 상담을하니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는 가기 힘든 성적이라는 결론이 났다. 마지막 시험이 중요하다고 해서 공부를 시켜보려고 했는데 하려고 하지도 않지만 한다 한들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됐다. 고맙게도 담임선생님이 특별전형을 알려주셨다. 특별전형은 서류를 통과하면 면접을 통해 걸맞은 인재인지 선별해 입학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성적이 낮지만 다른 학교 생활이 문제 없으므로 원서도 쓸 수 있었다. 특별전형은 선생님의 추천이 가장 중요했다.

아이는 열심히 준비했다. 어쩌면 처음이었다. 우리 도시에 특성화 고등학교 자체가 일반 고등학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구에 특성화 고등학교는 딱 한군데 있었다. 집에서 3km 떨어진, 가장 가까운 실업계 고등학교였다. 친구들과 같이 가기로 약속한 아들은 내게 예상 답변을 적어달라고 해서 달달 외웠다. 평소에 외우는 걸 죽기보다 싫어해서 어떤 시험도 승산 없던 아들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리고 결국 붙었다. 시험장에서 웃으면서 걸어 나오는 아들을 보고 참 많이 컸다 싶었다.


아이의 고등학교가 결정되자 우리의 행복지수는 올라갔다. 남들 다가는 학교? 아니, 그런 건 없다. 학교생활은 반드시 노력이 필수다. 아이는 격동의 사춘기를 스스로 극복하고 무사히 학교생활을 하는 것을 완성했다. 나 역시 아이의 사춘기를 '나 죽었소' 하고 견뎌낸 보람이 있다. 아들은 공부는 못했지만 성실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지각 한번 하질 않았다. 물론 소소한 문제들은 돋아났지만 결국 졸업을 맞게 됐으니 고맙다.

 요즘 생각엔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스스로 알아낼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하여 고등학교에 가는가 싶기도 하다. 아무렴 어떠냐, 벽에다가 죽고 싶다고 대문짝만 하게 써 놓은 중학생이 본인이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당당히 합격해서 들어간다는데!! 아이는 다시 3년 내내 꿈을 찾아갈 것이다.  

 그러니 이 졸업이 내겐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아이는 몰라도 나는 안다. 나의 중학교 졸업에 우리 엄마도 그랬을까? 돌이켜보면 나도 그다지 적극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3까지 간헐적으로 쓰던 일기장을 가지고 있다. 가끔 펴보면 B5쯤 되는 종이에 '죽고 싶다'고만 갈겨쓴 일기를 서너 장 볼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힘들 때는 일기장을 꺼낸 모양이다. 모든 일이 생각나지 않지만 바탕이 초록색인 그 일기장을 꺼내들 때면 늘 외뤘고, 억울했고, 언짢았던 기억이 있다. 여섯 살 어린 동생을 껌껌할 때까지 혼자 돌봤어야 했고, 친구네서 놀다가 늦게 늦게 올 때마다 엄마에게 하도 매를 맞아서 아예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다. 나는 집이 싫었다.  엄마도 마음 꽤나 졸였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우리 엄마도 대단하다. 하지만 엄마와 나는 확실히 다르다.



 한 가지 섭섭한 것은 아들이 내게 학교에 오지 말란다.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운동장에 들어오지도 못하는데  뭐 하러 오냐는 것이다. 운동장에는 못 들어가도 꽃다발 안겨서 사진은 찍어주고 싶은데. 우리 아들 졸업했어요 당당하게 자랑하고 싶은데 왜 오지 말라고 하는지. 이유야 분명히 있지만 그래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축하한다 아들아. 스스로도 엄청 축하한다. 1학년 때는 방황했고 2학년 때는 또 다른 이유로 괴로워했지만 3학년이 돼서 진정한 친구도 만나고 나름의 성취감도 느껴보고 가고 싶은 학교도 갈 수 있게 돼서 너무너무 기쁘고 뿌듯하다. 앞으로도 그 애의 인생에 있어서 나는 충실한 지지자가 되어 줄 예정이다. 성인 가족들은 이제 잔소리를 멈추고 나를 좀 지지해 주면 좋겠다. 사실은 나야말로 얼마나 도망가고 싶었는지. 엄마고 뭐고 때려치우고 산속 깊은 곳이라도 가 버리고 싶었다. 그만큼 너무 힘들었다. 지금 여기서 다 이야기 하긴 어렵겠지만.


​ 어쨌든 이렇게 쓰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하다. 자, 이젠 자야겠다. 졸업 전 마지막 등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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