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일을 시작한 뒤로 저녁에는 옥상에 올라가지 못했으니, 정말 딱 15분이었다. 다른 고양이, 개들과도 나는 매일 15분 남짓밖에는 보내지 못했다. 그땐 그랬다.
그러나 눈이는, 눈이가 고양이별로 떠나는 그날까지 15분이었다. 나는 그 애를 늘 15분만 사랑했다. 그때는 그것이 많이 후회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회되지 않는 반려생활은 없었다. 먼저 보낸 열세 마리 고양이들과의 반려생활은 후회로 점철되었다.
그들이 한 생을 사는 동안, 나는 아무런 힘도 없었고 심지어 그들 옆에 제대로 있어주지도 못했다.
눈이와 나는 15분을 알차게 썼다. 상처가 낫자 눈이는 이때다 하는 마음으로 옥상 바닥을 뒹굴뒹굴 굴러다녔는데, 넥카라 없는 눈이가 상처를 뜯을까 봐 화단을 어슬렁대는 눈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통통한 몸매를 옆으로 누이고 바닥에 꼬리를 탁탁 치던 눈이의 고개가 등 쪽으로 움직이면 쏜살같이 다가가 넥카라를 씌웠다.
눈이의 상처가 다 낫고, 털이 복슬복슬 돋아난 후에도 한참 동안 넥카라를 벗기지 못했다. 나는 늘 눈을 홉뜨고 눈이를 지켜보았다. 1년을 그랬다.
눈이는 시골로 이사를 갈 때가 되어서야 넥카라를 벗을 수 있었다. 그때 눈이는 대략 여덟, 아홉 살 정도였다. 부모님과 고양이들, 강아지들 일부가 먼저 시골로 이사를 했다. 나를 포함 함께 살던 강아지들이 시골로 들어간 건 8개월쯤 지난 뒤였다. 눈이는 내가 챙길 수 없었던 8개월 전에 넥카라를 벗었다.
다행스럽게도, 눈이는 자신의 등 대신 새 집과 시골 풍경에 관심을 가졌다. 이참에 다른 고양이들과 합사를 시켜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합사 이전에 우선 집을 나란히 지어 서로를 볼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서로를 노려보며 와옹와옹 울고 난리도 아니었다. 결국 두 집은 맞닿은 부분에 불투명한 비닐을 덧대 서로를 볼 수 없도록 보수했다.
아빠는 우리 집 외벽에 고양이 집을 덧 지었는데, 내 방 화장실 창문이 눈이의 집과 이어지게 되었다. 내 방 화장실 창문은 일반적인 방의 실내창과 비슷한 정도로 커서, 눈이가 뭘 하고 있는지가 전부 보였다.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눈이야?'하고 부르면 눈이는 '애옹' 소리와 함께 창문 앞으로 와 방충망에 얼굴을 비볐다. 벌레가 많은 시골집이라 방충망은 고정되어 있었고, 나는 눈이가 얼굴을 들이댄 방충망을 살살 긁어주었다.
눈이를 찍은 사진은 이 시절이 전부다. 눈이 이야기에 실린 사진의 배경이 모두 똑같은 이유다.
눈이는 내 손 대신 방충망에 볼을 비비곤 했다. 커다랗던 눈이의 눈이 은근해지는 순간이었다.
처음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을 때 찍은 사진들은 2G 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디바이스가 바뀌며 사라졌다. 그러나 나에게는 고등학생 때부터 시골로 오기 전까지 고양이 사진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건물 옥상에서 열 마리가 넘는 고양이와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은, 어린 내가 생각할 때 결코 '정상적인'일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근사한 캣타워가 있는 넓은 거실에서 편히 누워 있는 고양이들과 보기만 해도 악취가 진동할 것 같은 공간에서 누울 틈 하나 없이 빡빡하게 들어찬 고양이들이 방치된 아비규환의 공간, 그 속으로 걸어 들어온 카메라 든 사람을 힘없이 올려다보는 고양이들이 번갈아 등장했다. 나에게 우리 집은 후자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고양이들을 거의 찍지 않았다. 언젠가 그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가면, 그때 많이 찍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오지 않았다. (반려동물의 시간은 너무도 짧다.)
나는 후회가 많은 사람도, 후회를 오래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일만은 아직도 후회한다. 갖은 힘을 다해서 우리 곁에 남은 동물들을 건사하려 한 우리 가족의 노력을 긍정하지 못했던 것. 그 때문에 소중했던 이들의 사진을 거의 찍지 못한 것. 결국 내가 나의 현실을 왜곡된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시절은 사진 없는 시간으로 남았다.
정상성이란 좀처럼 획득하기 어려운 것인데도, 나는 나만 그 성질에서 빗겨나갔다고 믿었다.
시골로 이사 온 눈이는 더 이상 자기 몸에 상처를 내거나, 천을 뜯어먹지 않았다. 눈이는 15분의 시간도 제대로 내지 못했던 나를 늘 애옹, 하며 반겼다. 늘 잠만 자는 것 같다가도, 어쩌다 집에 잘못 들어온 새를 사냥하며 날카로운 야생성을 빛냈던 눈이.
눈이는 죽기 전까지, 상처 없는 날들을 즐겁게 보냈을까?
눈이가 죽은 날 밤, 블로그에 남긴 비밀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너는 월요일부터 병원에 다녔다. 수액을 맞았고 주사도 맞았다. 물을 잘 마시길래 의사 말 대로 나을 줄 알았다. 오늘 억지로 밥을 먹이다가 입에서 피가 줄줄 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밤, 너는 이동장에서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몸을 뒤챘다. 집에 도착했을 때 너는 죽어있었다. 타온 약도 한 번 먹이지 못했다.
너는 나에게 첫 번째가 되지 못했다. 나는 너를 첫 번째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너는 이모가 데려온 업둥이었고 이미 우리 집에는 너무 많은 고양이와 개들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마음껏 슬퍼할 수가 없다. 너를 오랜 시간 충분히 만져준 것도, 너를 위해 눈물 흘린 것도 모두 네 몸에서 숨이 빠져나간 뒤였다. 나는 너에게 해준 것이 너무 없어서, 귓가를 찌르는 슬픔이 죄스럽기만 하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슬프지도 않아야 하는데. 사랑했다면 최선을 다했어야 하는데.
너를 병원에 데려갔던 월요일에 나는 핸드폰을 뒤져 너의 사진이 하나라도 있는지 확인했다. 사실 나는 너와의 영원한 이별을 예감했다. 많은 고양이들과 개들을 잃어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핸드폰에는 너의 사진이 세 장 남아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었다. 초록색 눈이 휘둥그레 커서 '눈이'라 불렸던 고양아. 안녕. 고양이별에서는 가고 싶은 데 가고, 밥도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넓고 폭신한 집에서 살아. 우리랑 십 년 넘게 살아줘서, 우리 이모 눈에 띄어서 우리 집에 와줘서 고마워. 고마웠어."
너는 충분히 내게 신호를 주었는데도, 나는 네가 원하는 만큼 너를 사랑해주지 못했다. 네가 준 사랑에, 나는 변명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더 나은 조건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보다, 너의 울음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봐주지 못한 것이 훨씬 더 아프게 남는다.
너를 일찍 떠나게 한 것은 결국 나의 무신경인 것 같아서.
네가 떠난 지 3년이 조금 못 되었을 때, 나는 우연히 너를 떠올리게 하는 고양이를 만났다. 너처럼 사람을 경계하고, 너처럼 다른 고양이들에게 미움받지만, 네가 이동장도 없이 이모 품에 안겨 우리 집까지 왔던 것처럼 살아남기 위해 큰 용기를 내어 우리 집을 찾아온, 콩알만 한 새끼고양이였다.
*2005년부터 2024년까지, 열여덟 마리의 고양이와 일곱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았고 그중 일부와 이별했습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과의 인연은 이별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떠나간 존재들, 그리고 제 옆을 지키고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 놓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