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마리 고양이로도 버거웠던 우리 집에 은심이라는 큰 개와 초코라는, 손바닥만 한 갈색 푸들 강아지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양이로 끝날 거라 믿었던 우리의 반려생활이 강아지로 확장되는, 그야말로 가족사 대격변의 순간이었으나 당시의 우리는 그에 대해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역사적 대격변의 순간을 당시 사람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10년이 훌쩍 넘게 지난 2024년 현재, 우리 집에는 다섯 마리 개가 있다. 개농장에 팔려갈 뻔 한 흰돌이를 제외한 네 마리 모두가 갈색 푸들이다. 우리 집 푸들의 시조, 초코와 그의 후손 세 마리. 우리 집 푸들들의 조상인 초코는 아직 건강하게 잘 살아있다.
우리 집 푸들 가족의 현재 가계도를 그려보면 이러하다.
소파에 앉은 사람은 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왼쪽부터 알파, 초코, 세나, 두나 순이다. 하나와 막둥이는 삼촌이 키우고 있어 나에게는 갓 태어난 강아지 시절 사진뿐이다.
우리 집에는 푸들의 조상 초코와 초코의 아들 알파, 알파의 새끼로 추청 되는 두나와 세나가 함께 살고 있다. 파이는 우리가 시골로 완전히 이사 오기 전에 강아지별로 떠났다. 두나와 세나의 엄마인 미쯔는 하나, 막둥이와 함께 삼촌과 살고 있었는데 올해 암이 심해져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떠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기로 한 브런치북이라 파이의 이야기를 쓰려고 보니, 우리 집 푸들들의 역사를 돌아보지 않고서는 어렵겠다 싶었다. 내가 나의 부모님을 이야기하지 않고서 나만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것과 같다. 30년을 넘게 산 나에 대해서도 부모님을 아예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는데, 열 살이 채 되기 전에 죽은 파이는 오죽할까. 그러니 조금 길어질지라도, 나는 초코와 그들의 후손 이야기를 쭉 적어 내리고자 한다.
처음 초코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초코가 스무 살이 가까운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 하나 예측하지 못했으니, 그 작은 강아지가 가계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후손을 남긴, 우리 집 푸들의 시조가 될 거라는 것 역시 까맣게 몰랐다.
아래부터는,어렸던 나는 까맣게 몰랐던 지금에야 쓰는, 시초의 기록이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초코는 엄마의 앞치마 주머니에 담겨 내 방에 왔다. 엄마와 나는 아직도 초코를 보면서 그날을 추억하는데, 그때의 초코는 이후 태어난 어떤 푸들보다도 예쁜 갈색 푸들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인형처럼 예뻐서, 지금도 꼬불꼬불한 갈색 털과 그 안에 던져진 까만 콩알 같은 두 눈과 코가 제법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사진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 참 아쉽다.
그날 수업을 해야 했던 엄마는 내 방에 초코를 맡겼는데, 아직 3개월도 채 되지 않았던 그 작은 강아지는 내가 잠든 사이에 침대 밑에 내려가 똥을 쌌다. 침대에 배변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초코는 매우 영리했다.
벌써 세 번째 등장하는 레퍼토리.초코는 이모가 데려온 강아지였다. 이모는 은심이를 데려오고 1년 좀 넘어서 초코를 데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를 데려왔다. 아직 하나 더 남았는데, 그 이야기 역시 이 계보의 일부이니 곧 하게 될 것이다.
초코는 당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던 사촌동생에게 주는 중학교 입학선물이었다. 이모는 일정한 거주지 없이 돌아다니며 일했고, 사촌동생은 우리와 살고 있었다. 지금이야 개나 고양이를 사서 선물하는 일이 야만적으로 생각된다만 당시에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러니 우리는 그 일이 얼마나 비윤리적인지보다, 아홉 마리 고양이와 한 마리 개로 풀방인 우리 집에 동물이 한 마리 더 는다는 것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초코를 보고 나면 곤두세울 촉각도 다 문드러지곤 했다. 초코는 너무 귀여웠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은심이와는 데면데면했던 사촌동생도 초코는 참 좋아했다.
당시 엄마는 이 인형처럼 예쁜 강아지에게 미미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는데, 사촌동생은 초코라 부르고 싶어 했다. 초코의 뒤치다꺼리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사촌동생이 아닌 엄마의 몫이 되고 말았지만, 당시 초코의 주인은 사촌동생이었으므로 초코는 초코미미라 불리다 초콜릿 굳듯이 초코로 굳어졌다.
초코는 사촌동생이 학교에 간 사이 혼자 있기에는 너무 작고 작아서, 엄마는 일하는 동안 원장실에 초코를 데리고 있었다. 어딜 가든 꼭 데리고 다녔다고 했다. 너무 귀엽고 작아서, 도저히 혼자 둘 수가 없었다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코 사진 중 하나다. 초코는 이 사진을 찍을 때 이미 할머니였는데 (초코 옆의 강아지가 손녀다) 이때부터 스무 살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줄곧 예쁘다.
그러나, 초코의 견생은 그 존재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순탄하지 못했다.
우리 집에는 이미 동물이 너무 많았고,
함께 살고 있던 할아버지는 동물이 집 안에 산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했으며,
우리 집의 구성원 중 누구도 집 안에서 개를 키워 본 경험이 없었다.
반려견과의 생활에 대해 하나도 몰랐던 우리와 초코는 이런 연유로 함께 살게 되었다.
*2005년부터 2024년까지, 열여덟 마리의 고양이와 일곱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았고 그중 일부와 이별했습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과의 인연은 이별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떠나간 존재들, 그리고 제 옆을 지키고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 놓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