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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재 Dec 10. 2022

시간여행은 필요 없을지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삐뚤빼뚤 굴곡진 인생사를 다리미로 쫙 펴듯 어느새 후회만 고여 있는 과거의 그 골짜기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미 지구 밖으로 날아가 버린 짧았던 행복의 순간보다 조금 불행하기도, 가끔은 많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때 그곳으로 돌아가 이미 꽉 묶여버린 현재의 매듭을 풀 수만 있다면.


그렇다.


 후회와 아쉬움 위에 짓누르고 앉아있는 의 의지를 운명시곗바늘에서 바라보면 무한한 가능성은 미래에만 있는 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 사이에도 있다. 그래서 어쩌면 미래인이 되어 과거의 현실을 다시 경험하는 일은 과거인으로 남아 미래를 맞이하는 일과 별로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주는 인간의 이야기 별 관심이 없다. 사랑, 성공, 실패, 죽음이 그 무엇이든지 간에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할 뿐, 시간의 축 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이야기는 우주 앞에 단순한 붉은 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테다.


 호기심으로 펼쳐진 시간의 바다 에서 후회를 매고 과거로 가라앉는다고 도, 현실은 과거와 미래의 그림자가 아니다. 카르페디엠을 외칠 때마다 시시각각 넓어지는 사건의 지평선 속에는 오직 관측 가능한 과거의 정보만 남아있다. 설령 막다른 행운으로 다른 우주나 빅 크런치를 통해 과거와 조우할지언정, 시간여행에 대한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감정은 상태에 대한 지각이지, 결핍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문화산업은 시간여행자를 위해 히치하이킹을 자처하지만,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또 다른 지각만 제공할 따름이다.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은 마치 버블처럼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의 행동반경을 무한히 벌려 놓을 뿐, 실존을 꿈꾸는 내적 욕망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여행은 무의미와 의미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고뇌의 산물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는 이상, 현실에 생긴 거대한 공백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현실의 불완전성은 과거를 고치거나 과거에 가두면서 완벽해질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만이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순수한 호기심 외의 것들을 현재에 남겨놓고 떠나지 않는다면, 타임 루프에서 우리가 얻을 것은 현재에서 얻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시간여행을 했고, 지금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노이즈만 가득했던 태초부터 카르다쇼프 척도에 해당하는 모든 종류의 문명에서도 살아 봤지만, 결국 내가 존재하는 모든 곳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지극히 현재라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중첩으로 쌓아 올린 인과율은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사람의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의 시간은 인과율에 얽매어 있는 수많은 정보들을 현재의 의미에 귀속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수 조개의 별빛이 밤하늘로 눈부시게 쏟아지던 날, 어느 바위에 함께 앉아 우주의 소멸을 지켜보던 그녀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이 부럽지 않아요. 우리는 곧 다시 태어납니다. 입자에서 생명으로, 다시 입자로. 당신이 한다던 그 여행, 끝까지 응원할게요. 나는 여기에 앉아 영원히 존재하고 있겠습니다." 그녀는 내가 만난 고등생명체 중에 가장 뛰어났다. 그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았다. 시간여행을 할 줄 아는 존재는 오직 나밖에 없었지만 정작 시간에 구애받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는 거대한 대양을 단지 임의의 세 등분으로 나눈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개념이었다. 인과에 얽매이지 않고 기억을 믿지 않았으며, 미래를 염원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시간의 바다를 표류하고 있는 걸까? 그녀와 헤어진 후 나는 더 이상 시간여행을 하지 않기로 했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하게 흩뿌려져 있는 별들 가운데에서 별자리를 찾거나, 반쯤 타 버린 식빵에서 예수의 얼굴을 발견하거나, 눈 덮인 들판에서 혼자만 머리를 내밀고 있는 들꽃을 바라보는   일과 같다. 인생은 시간여행을 요구하지만 의미는 인과율로 찾을 수 없고, 시간은 행복에 무의미하다. 현실 감각을 깨우는 차가운 관측만 있으면 된다. 그 시선 너머에는 별자리도, 예수의 얼굴도, 오롯이 피어 있는 들꽃도 있다. 과거로 돌아가서 현재를 바로잡는 것보다 후회와 기억을 사랑하며, 미래를 그리워하는 것보다 시시콜콜한 현재를 즐기는 게 더 의미 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에게 더 이상 시간여행은 필요 없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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