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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부맥가이버 Oct 17. 2023

[시] 참 느려 터졌지 그 양반

처녀 적에 지하철 8호선에서 2호선을 갈아타려고 환승 구간을 막 걷기 시작했는데

지하에는 전혀 표도 안 나는 축축하고 적적한

어느 여름밤이었지

어디 가려고 했는지 기억에도 없지만

그날의 기록만은 역사적이었어 

그거 아나?

지하철이 오면 댕댕댕댕댕 종소리가 들리잖아

아이큐나 높을 것이지 쓸데없이 청각은 

발달해 가지고서리

초입부텀 종소리가 울려 퍼지질 않았겄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여?

그렇지 냅다 달려야지 

시간은 돈인데 암암, 

난 내쳐 달리기 시작했지

저 열차를 놓치면 

내 인생은 끝장이라도 날 것처럼

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난 외로운 선구자처럼

가벼운 발걸음을 시멘트 바닥에 구르며 나아갔지

아, 그런데 내 뒤에 사람들도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거 아니겄어?

엇, 나는 괜히 사람들이 뒤따라오니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일백 메다 경기 선두라도 

되는 양 더 내달리질 않았겄어?

그러니까 사람들도 금메달이 탐이 났는가

날 막 추격하는 거 아니겄어?

거참, 난감하더라고

그래도 어쩌겄어?

시간은 돈인데 암암, 

이를 악물고 달리는 것이었지

2호선 열차 타는 곳에 딱 1등으로 도착했는데

이, 럴, 수, 가

글쎄 반대편 열차가 온 것이 아니겄어?

역시 인생은 이렇게 예고 없이 

사람 뒤통수를 친다고 그랬나

하다못해 지하철도 나를 등쳐먹으니 말이야

내 뒤에 주루루룩 따라온 사람만 

스무 명 남짓인데

거참, 난감하더라고

그래도 난 절대 고개 숙이지 않았어

내가 금메달 아니겄어?

지하철환승구간육상선수권대회 금메달 

나는 금의환향하며 어디론가 향했겄지

이런 역사적인 기록에도 불구하고

난 이제 결코 환승 구간을 뛰지 않아

우리 집 양반 말이야

그 양반은 족보 있는 양반가라서 그런가

종소리가 나건 새소리가 나건 뭔 발광이 나도

환승 구간에서는 절대 안 뛰더란 말이야

내가 역사적인 날의 난감함도 있고 해서

그 느려 터진 양반 

그 양반 따라 이제 뒷짐 지고 걷네

그렇게 살다 보면 뒤통수 얻어맞을 일은 좀 

없는 것 같더라고

욕하면서 뒷짐 지고 걷네, 나는 

정말 날랜 여자였는데 참 느려 터졌지 그 양반은 








이정록 시인의 '참 빨랐지 그 양반'을 

읽다가.......

내달렸던 젊은 날

뜀박질의 기억이 떠올라서....... 쓴 시다.


이 두 [시]의 공통점은

*'사랑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고 사랑을 표현한다.'

이다.


* 은유 작가  [쓰기의 말들] 89페이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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