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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Ed Mar 04. 2019

그는 내가 처음이 아니다

목욕탕에서 생긴 일

12월 말 즈음의 일이다. 엄마랑 나는 겨울에 목욕탕을 자주 간다. 엄마랑 나는 막 목욕탕에 입장해 빈 자리를 찾고 있었다. 엄마는 눈이 너무 나빠 안경을 벗으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남들이 맡아 놓은 자리인지, 빈 자리인지 유독 헷갈릴 때가 많다. 그 날도 그랬다. 엄마는 문 쪽 자리를 보고 "여기 자리에 사람 없는 것 같다!"고 외쳤다. 나는 그 자리를 확인하고 곧 바로 "사람 있는 것 같은데?"라고 답했다. 맡아 놓은 자리에 마음대로 앉은 것도 아니고, 물건을 멋대로 치우지도 않았다. 별 거 없는 평범한 대화였다.


다른 자리를 찾아 막 이동할 때였다. 갑자기 근처에 있던 할머니가 버럭 화를 냈다. 여기 이렇게 표시 해놨는데도 안 보이냐면서, 그것도 못 알아보냐며 짜증과 신경질을 퍼부었다. 평소 성격이 더러운 내가 그 신경질을 듣고 가만 있을리 없었다. 난 그것을 눈이 잘 안 보이는 우리 엄마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난 큰소리로 엄마에게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많다면서, 자기 짜증을 구별 못 하고 푼다며 무안을 줬다. 분명 그 할머니도 내 말을 들었겠지만 별 다른 대꾸는 없었다.


난 내심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아직 어린 것인지, 나에겐 여전히 이기냐 지냐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승리감은 곧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한 앳된 목소리 때문이었다. 어떤 중년의 여성이 그 할머니 주변에 와서 아이같은 목소리와 말투로 재잘거렸다. 할머니는 목욕탕에서 이러면 안 돼, 저러면 안 돼 주의를 주기도 했다. 아마 장애가 있는 딸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처음 지목했던, 할머니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던 문제의 그 자리는 딸의 자리였다.


난 그날 그 할머니와 딸을 처음 봤지만 그 모녀는 딸의 장애를 이유로 핍박받고, 뺏기고, 해코지하는 많은 사람을 만났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엄마와 나의 사소한 행동에도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그냥 성질 더러운 할머니겠거니 하고 경솔하게 반응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그 모녀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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