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82년생 김지영_조남주
여러 명의 사람에게서 이 책을 추천받았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괜한 고집 때문에 읽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 읽지 않아도 어떤 내용이 있을지 뻔한 느낌이었다. 내가 겪고 있고 내 주위 여성들이 겪는 그런 삶이겠지. 읽으면 괜히 마음만 답답해지겠지 생각하며 이 책을 찾지 않았다.
그동안 이 책은 꽤 많은 인기를 끌었고 서점을 돌아보다 다시 이 책과 마주하였다. '잠깐 훑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서론을 읽고 나는 빠져들고 말았다. 이 책은 뭐지? 스릴러인가? 왜 이렇게 무섭지? 서론에 엄청난 몰입을 이끌었고 나는 그 이끌림에 이 책을 샀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서론을 읽어보라!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나이 차이는 약 10년 정도 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왜 그녀의 삶과 나의 삶은 세대차이조차 느껴지지 않을까? 극단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은 정말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좋은 직장 맞네. 그럼 누구한테나 좋은 직장이지 왜 여자한테 좋아? 애는 여자 혼자 낳아? 엄마, 아들한테도 그렇게 말할 거야? 막내도 교대 보낼 거야?
[책] 82년생 김지영 中
'여자가 일하기 좋은 직장'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학교, 공공기관, 공기업, 은행 등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출산휴가를 눈치 없이 쓸 수 있고 복직도 수월한 곳이 바로 여자가 일하기 좋은 곳이다.
여자에게만 육아를 강요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우리 사회다. 아이는 왜 여자만 키우는가? 아이에게는 부모가 2명인데, 아버지는 육아의 책임이 없는 건가?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곳이라면 모두에게 일하기 좋은 곳이다. 출산과 육아를 여자에게만 강요하며, 그것을 위해서 여자니까 출산과 육아휴직이 잘 되어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참 화가 나는 일이다. 나도 하고 싶은 분야하고 다니고 싶은 회사가 있는데 개인의 선호, 능력과는 관계없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이 잘되는 곳으로 가라니.. 이는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 중에 하나이다.
그 과정에서 교수들은, 기업에서 남학생을 원하는 뉘앙스였다, 군대를 갔다 온 것이기 때문이다, 등의 선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해명을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절망적인 것은 학과장의 대답이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워해. 지금도 봐, 학생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줄 알아?"
어쩌라고? 부족하면 부족해서 안 되고, 잘나면 잘나서 안되고, 그 가운데면 또 어중간해서 안 된다고 하려나?
[책] 82년생 김지영 中
김지영은 취업 준비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약 1년 전 나 역시 취업에 난항을 겪었고 60여 곳의 기업에서 서류 광탈 (서류전형에서 빛의 속도로 탈락하는 것) 당했다. 내가 탈락한 모든 이유를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여자이기에 기회를 갖지 못하고 더 많은 탈락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원했던 금융권은 보수적이고 그 어느 기업보다 남자를 선호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증권사 인적성을 보는 사람의 95% 이상이 남자라고 한다. 금융권은 경제, 경영학과 학생들이 지원을 많이 하는 곳이며 경제, 경영학과의 남녀의 성비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서류를 통과한 여성이 10명의 1명꼴도 안되다니! 여자가 학점이 좋지 않은 게 아니냐고? 여자들이 자기소개서 글을 잘 못쓴 게 아니냐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말하면서도 느낄 것이다. 학창 시절 자신 주변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공부를 잘했는지, 말을 얼마나 조리 있게 잘하는지.
결국 호주제는 폐지되었다. 2005년 2월에 호주제가 헌법상의 양성평등 원칙에 위배된다는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나왔고, 곧 호주제 폐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개정 민법이 공포되어 2008년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이제 대한민국에 호적 같은 것은 없고, 사람들은 각자의 등록부를 가지고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자녀가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른 경우는 호주제가 폐지된 2008년 65건을 시작으로 매년 200건 안팎에 불가한다.
"아직은 아빠 성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지. 엄마 성을 따랐다고 하면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겠지. 설명하고 정정하고 확인해야 할 일들도 많이 생기겠지."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책] 82년생 김지영 中
초등학생 때 나는 왜 '홍씨'인지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우리 엄마는 왜 홍씨네 집안사람들이라고 말하며 나를 자신과 다르게 부르는지
나의 가장 가까운 엄마는 왜 나와 성이 다른지 이해하지 못했다.
훗날 나는 호주제가 폐지되었다는 것을 보고 나의 자식은 나의 성을 따르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힘들다면, 아이의 이름에 나의 성을 넣어서 지어주리라 생각했다.
지금도 어머니의 성을 따르기란 힘들다.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고 하면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법이 바뀐다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아버지 쪽 제사를 우선순위로 생각하며 찾아가고 있다.
무심코 던진 말에 마음이 베인다.
임신한 김지영에게 동료가 한 말
회사에서는 임신한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출근과 퇴근 시간을 30분씩 늦출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김지영 씨가 임신 사실을 알리자마자 남자 동기가 대뜸 말했다.
"와, 좋겠다. 이제 늦게 출근해도 되겠네."
[책] 82년생 김지영 中
공원에 아이를 산책시키면 들었던 말, '맘충'이라는 말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책] 82년생 김지영 中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 어느 누가 여성에게 출산을 장려할 수 있을까?
10년이 지나도 대한민국 여자는 '김지영'이다.
출근길 지하철 사람들 틈에서 서서 이 책을 읽었다. 창피하게도 책장을 넘기는 순간순간 울컥했다. 나에게 일어난 일처럼 화났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슬펐다. 대한민국에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일들이라는 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회와 문화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내가 겪은 일, 내 친구가 혹은 우리 엄마가 겪은 일이다.
나는 행복하고 싶고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할 것이다.
나는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다만 생각해본다, 내가 임신과 출산을 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회사에서 나를 여자라는 이유로 임금과 승진 등에 차별하지 않는다면
육아가 나에게만 유독 많이 강요되지 않는다면
자녀와 시간을 보내며 내 일도 할 수 있다면, 내가 과연 아이를 원하지 않았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