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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소한

굳이 멀리 갈 필요 없어요

10월의 동네 산책

by 홍슬기

길바닥에 흩어진 은행과 꼬릿 꼬릿 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가을이다. 뭉글뭉글 구름이 가득하고 약간 선선한가 아니 부드럽네 하며 나를 흔드는 바람이 느껴진다면 가을이다.

가을이라면 굳이 멀리 나가지 않아도 괜찮다. 동네 산책 한 바퀴 면 된다.


사실 나는 우리 동네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아파트 단지로 빽빽하고 체인점들이 가득해서 동네 카페, 동네서점 등이 살아남지 못하는 곳이다. 빽빽한 아파트만큼 사람들이 많은 동네다. 하늘에 얼기설기 늘어진 전봇대 선을 좋아하는데 우리 동네는 그런 전봇대 선이 없다. 도시적인 주거지, 계획적으로 정비된 곳에 우리 동네다.


그래도 10월에 여유로운 주말을 위해 굳이 멀리 가고 싶지 않았다. 하늘공원에 갈대가 참 이쁘지만 가는 길, 오는 길 사람에 치이고 싶지 않았고 자전거를 꼭 한강에서 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가을이 완연한 10월에 오늘 나는 동네 산책을 했다



내가 동네 산책하는 법



동네 빵집에 들러 점심거리를 산다.
큰길, 대로변 쪽이 아닌 아파트 사이, 골목 사이로 들어간다.
육교에 올라가 하늘,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들을 본다.
또 골목으로 들어간다.
내 눈에 띄는 것을 찍는다.
빛이 드는 곳을 찍는다.
사진을 확대하여 내가 보고 있는 것에 더 집중되도록 찍는다.




나는 사진을 많이 찍는다. 사람보다는 풍경을 찍는 걸 좋아한다. 하늘, 구름, 나무, 산, 바다 등 자연을 좋아해서 그런 거 같다. 그래서 간단한 산책을 해도 사진이 수십 장은 금세 넘어간다.

나에게 산책이란 사진으로 기록하기라 할 수 있겠다.




나무 팻말 이야기


얼마 전부터 동네 나무에 팻말이 붙여졌다. 동네 시민단체 혹은 시 산하 단체에서 한 것으로 생각된다.

단단한 나무에 손글씨로 쓰인 나무이름을 보니 초등학생 때 식물에 이름 팻말을 달아주던 때가 생각난다. 갑자기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든다.


이 나무 팻말은 참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위에 무수히 많은 나무들이 있는데 그 이름을 잘 모르고 지나간다. 이렇게 팻말을 붙여준다고 그 나무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을 본 순간 나무를 천천히 바라보게 되고 잎모양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며 기억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방금 본 그 나무 이름을 벌써 까먹었지만 이렇게 하다 보면 다른 곳에서도 '아 이 나무 어디서 봤는데' 하며 나무에게 아는 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은행이야기


가을이 되면 나는 이 은행 냄새가 너무 싫었다. 코를 막고 지나가기도 했고 은행을 발로 차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부터 이상하게 이 꼬릿 꼬릿 한 냄새가 나야 가을이 된 거 같았다. 그리고 이 냄새가 싫지는 않았다. 은행을 피해 걷기는 하지만 그것이 일종의 가을 게임처럼 콩닥콩닥 재미있기도 했다. 요즘은 은행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보며 사랑받지 못하는 은행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이가 들었나 보다.







햇빛이 좋아 한참을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나를 한번, 내가 찍은 곳을 한번 바라본다. 그때 괜히 뿌듯함이 든다. 나를 보고 그 익숙했던 공간이 조금이라도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나만의 괜한 생각이겠지만.


요즘 동네를 다닐 때마다 괜히 센치한 기분이 드는 건 오래도록 살아온 이곳을 1-2년 내로 떠나게 될 거 같아서이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같이 있을 때는 괜히 밉고 귀찮다가 막상 헤어질 때가 되면 행복했던 거 같고 마냥 아쉬운 거. 그래서 괜히 동네빵집 가보고 삥 돌아 육교도 올라가고 그런다 요즘은.

여기밖에 없는 것들이니까.


그래 생각해보니 좋은 것들이 많은 동네다.

안양천이 가까이에 있어 산책하기, 바람 쐬기 좋고 봄이면 벚꽃이 가을이면 단풍이 져서 멀리 구경 가지 않아도 되는 것. 우리 동네는 정말 없는 게 없어서 도시의 편리함을 물씬 느낄 수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살아서 동네 친구가 여럿 있고 이곳저곳 추억이 숨 쉬고 있다. 근처에 도서관이 2곳이나 있어 공부하기 책 읽기 참 좋다.


누가 뭐래도 제일 좋은 곳은 정이 묻은 곳이지.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우리 동네.









10월에는 동네 산책하세요.

굳이 멀리 갈 거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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