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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슬기 Dec 01. 2017

태풍이 지나가고 일상이 찾아온다

[책] 태풍이 지나가고_고레에다 히로카즈



불안하면 꺼내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연히 본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6년간 키운 아들이 자신의 친 아들이 아니라는 다소 신파스러운 소재였지만,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이후 어떻게 그것을 해결해 가지는지에 대한 내용을 천천히 그리고 차근히 보여주었고 마지막에 눈물이 찔끔 날 만큼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 후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영화관에서 보고 너무 좋아서 다운받아서 몇 번을 돌려보고는 그제야 감독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감동받았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역시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입에 잘 붙지 않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중얼거리며 외우려고 노력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각본과 연출을 다하는 사람이다. 이 부분이 나에게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작곡과 노래를 직접 하는 인디가수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먼저 알고 좋아한 것은 아닌데, 좋아하는 것들의 배경을 살펴보면 대체로 그렇다.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서 책임지고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각본을 쓰는 감독이기에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최근 한국에 자신이 만든 영화 두 편을 소설로 출간했다. 그중 한 권인 '태풍이 지나가고'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세세한 마음의 결을 담은 소설




그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태풍이 지나가고'였다. 늙어가는 엄마가 나오고 나이가 들어서도 철없는 아들과 이혼한 아내 그리고 아들이 나오는 그런 영화다. 대체로 우리네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담은 것이라 스토리를 요약하기 참 힘들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쓰이고 애착이 가는 영화였다. 그런 영화를 책으로 다시 만났을 때, 괜히 두근두근하면서 아쉬운 소리를 하면 어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책 읽고 나서 영화보다 더한 감동을 느꼈다. 영화에서 알 수 없었던 인물의 마음, 그 배경을 책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그 속에는 여러 가지가 함축돼있지 않는가. 보이는 사람의 행동과 말을 담은 것이 영화라면 책은 그 속에 함축된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가족의 습관, 상대와의 관계, 나만 알고 있는 타인에 대한 생각,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 등등 그 세세한 마음의 결을 소설에서 말해주고 있었다.








어머니의 집은 4층에 있다.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는데 멀리서 전에 들어 보지 못한 소리가 들렸다.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안내 방송이다. 귀를 기울이니 "금일, 오전 7시경부터, 82세 여성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복장은 베이지색 바지에...."라고 들려왔다. 길 잃은 노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나쓰미의 고독사 이야기와 더불어, 료타는 이 단지가 '늙음'을 맞이하고 있음을 새삼 실감했다.

[책] 태풍이 지나가고 中


소설책이든 영화든 일상 이야기를 하면 시시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거 같다. 거대한 담론도 역사성도 없는 작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허나 고레에다 감독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현실'을 기록하고 있다. 기사에 나온 그 어떤 말과 그래프보다 고레에다의 저 글귀가 고령화 사회를 와 닿게 해주었다. 이것은 일본의 현재이고 훗날 보면 과거의 기록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보면 길 잃은 어린아이를 찾듯 노인들을 찾는 모습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지만 조만간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몇 줄에 현실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고레에다 감독에게 감동하며 그가 계속 현실을 기록해주길 바란다.




"항상 말하잖아요. 그렇게 쉽게 안 된다고."
마치다는 말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구시렁구시렁 잔소리를 했다.
무모하기로는 전대미문인 료타에게 마치다는 몇 번이고 휘둘렸다. 그러나 마치다는 료타와의 관계를 끊지는 못한다. 일견 막무가내인 료타 내면에 자리한 연약함을 마치다는 이따금 느끼는데, 그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다.

[책] 태풍이 지나가고 中


영화 속에서는 대사 한마디에, 얼굴 한두 번 잡고 휙 지나가는 장면이었다. 그 속에 이런 마음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고 보니 마치다가 료타에게 괜히 져주는 거 같은 모습이 이해가 갔다. 도박에 빠져 집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료타는 경마장을 지나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잠깐의 즐거움을 느낀다. 그런 그 옆에서 마치다는 료타를 버려두지 못하고 핀잔하며 돈을 빌려준다. 그러면서 얼굴을 꽤나 밝아 보여서 왜 저러지 그냥 착한 사람인가 싶었는데 속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 올린 것이었다. 그렇다. 가족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니까.




"아빠는 우리를 좋아할까."
신고의 말이 도시코의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료타가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일은 알고 있다. 당연한 업보일 수도 있겠으나, 신고는 료타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니......"라고 도시코는 말했다.
그러자 신고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럼, 복권 당첨되면 다시 다 같이 살 수 있을까나."
너무나 가여웠다. 신고는 부모가 이혼한 가장 큰 원인이 돈 문제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게.... 그러면 좋겠네....."라고밖에 도시코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 큰 집도 지어서, 할머니도 같이 살아요."
"어머 기쁘기도 하지. 꼭 그렇게 해 주렴."
도시코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책] 태풍이 지나가고 中


도시코는 신고의 할머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가 저런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속상할까 생각하며 떠오르는 그 모습을 책 속에도 영화 속에도 고스란히 담아져 있다. 신고가 나올 때마다 속상한 마음이 드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생밖에 안되었는데 부모가 이혼을 하고 애어른이 된 아이를 보면 그 속에 어떤 아픔이 있을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이가 아이답지 못할 때,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려온다. 신고는 지금까지 충분히 아팠으니 훗날 그 상처가 덧나지 않고 살아가길 바라본다.




"아빠는 뭐가 되고 싶었어?"
'공무원'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되고 싶었던 대로 됐어?"라고 신고가 덧붙여 묻는다.
소설가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 소설가라고 할 수 있을까? 십오 년이나 글을 쓰지 못한 소설가.
"아빠는 아직, 되지 못했어. 그래도 말이야, 됐는지 되지 못했는지는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지."
"정말?"
똑바로 쳐다보는 신고의 눈동자가 눈부시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정말이야, 정말, 정말."
스스로 다짐하듯 료타는 말했다.

[책] 태풍이 지나가고 中


책을 다 읽고 머리 속에 계속 맴돌던 신고와 료타의 대화다. 료타의 모습에 내 모습이 보였고 료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위로를 받았다. 내 세상이 정지된 듯한 요즘에 12월이 다가오니 말할 수 없는 마음이 들곤 한다. 그런 나에게 십오 년이나 글을 쓰지 못한 소설가 료타는 위안이 돼주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료타를 만나게 되면 내가 료타에게 잘 될 거라고 긍정의 말을 건넬 수 있었으면 좋겠다.







태풍이 지나가고 료타와 신고 그리고 교코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할머니인 도시코 집에서 나와 료타가 신고, 교코와 헤어지는 모습, 잠깐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을 가는 그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우르르쾅쾅 세상 무너질 듯 천둥번개가 치고 물폭탄이 내려도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일상이 찾아온다. 잠들지 못하는 오늘의 태풍이 지나고 나면 기나긴 나의 일상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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