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할 수 없죠, 창피하게2

-487

by 문득

우리 집 세탁바구니는 패브릭 재질로 둥그런 원통형으로 생겨서 윗부분에 철사가 들어있어 전체적인 형태를 지지해 주는 그런 물건이다. 이런 타입의 세탁바구니를 흔히 햄퍼라고들 많이 부르는 것 같지만 정확히 그 정의에 딱 들어맞는 물건은 아닌 것 같다. 쓸데없는 일에 대단히 까다로워지는 나는 이 세탁바구니를 고르느라 그야말로 몇날며칠동안 쇼핑몰을 뒤졌고 옆에서 보던 그가 어디서 천 떠다가 하나 만드는 게 빠르겠다는 볼멘소리를 할 정도였다.


이렇게 고심을 해서 산 덕분에 세탁바구니는 우리 집에 있는 사소한 물건들 중에서도 내가 매우 애착을 갖고 있는 물건 중 하나다. 용량도 보기보다는 대단히 큼직해서 어지간한 빨래는 곧잘 수납한다. 그러나 이 세탁바구니가 한 번씩 비명을 지를 때가 오는데, 요번의 침대 정리처럼 철이 바뀌어 침대를 정리하고 이불 등 큰 빨랫감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올 때다. 여름침구같이 착착 접으면 부피가 작은 것들은 좀 덜하지만 겨울이 지나 두껍고 부피가 큰 겨울이불 및 시트 등을 빨려고 내놓기 시작하면 이까짓 세탁바구니 하나로는 어림도 없다. 게다가 침구를 바꿔서 빨랫감이 줄을 서 있다고 해서 그동안 수건이나 속옷 같은 늘 나오던 빨랫감이 안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며칠 동안 우리 집 세탁바구니는 그야말로 미어터질 지경이 된다.


이럴 때 그는 걷어낸 침구들을 차곡차곡 개어서 일단 이불장 안에 넣어두고 그날 빨 것만 꺼내서 빤 후에, 다 마르면 잘 개어서 제 자리에 넣어놓는 방법을 썼다. 그러면 기껏해야 세탁바구니에 들어가는 빨래는 베개 커버나 쿠션 커버 같은 상대적으로 부피가 크지 않은 빨래들 뿐이어서 세탁바구니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대단히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귀찮다'는 것이다. 이불 하나를 빨아서 마를 때마다 넣어둔 이불을 몽땅 꺼내 제 저리에 넣는 짓을 이불 빨래가 다 끝날 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귀찮지만 보기 좋은' 방식이 다분히 취향에 맞지 않는 바, 요즘 우리 집은 널려있는 빨랫감들로 사방이 뒤숭숭하다. 꽉 차다 못해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인 세탁바구니 위로는 새로 나오는 빨래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고 그 와중에 제 세탁 차례를 기다리는 겨울 이불들이 세탁기 주변에 온통 널브러져 있다. 빨래가 다 끝난 이불은 적당히 개어서 무조건 이불장 제일 윗간에 대충 밀어 넣어둔다. 빨래가 다 끝난 후에 한 번에 정리하는 게 덜 귀찮기 때문이다.


이 꼴을 그가 본다면 얼마나 기겁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니 이렇게 너저분하게 널어놓고 살면 뭐가 좋냐고 대번 싫은 소리를 할 것 같다. 하긴 문제는 빨래 따위가 아니다. 그가 내 곁에 있던 그때에 비해 우리 집은 많이 너저분해졌고 많이 두서없어졌고 많이 엉망이 되었다. 만약에 지금 그가 돌아온다면 그는 그간 못다한 이야기를 채 나누기도 전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집안 대청소부터 하려고 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도 뭐 어쩌겠나. 나는 당신이 하던 것처럼 그렇게 부지런하고 깔끔하게는 도저히 못 살겠는데. 이러고 살 줄 모르고 그러고 도망간 거냐고, 내가 할 말은 그것 밖에는 없을 것 같다.


XL.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할 수 없죠, 창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