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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시즈닝을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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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마침 주말이고 해서, 바람이 엄청 불던 날 흙먼지를 덮어써가며 신문지를 구해 와서 한 알 한 알 싸 넣어놓고 맛도 못 본 감자를 몇 알 꺼내서 간만에 버터감자나 해 먹기로 했다. 감자의 상태가 어떤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고.


버터감자는 조리법 자체가 그리 까다롭진 않다. 그냥 껍질 벗긴 감자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삶은 후에 팬에 버터를 녹여서 좀 구워주면 그뿐이다. 물론 감자 껍질을 벗기는 작업 자체가 은근히 시간이 걸리긴 하고 감자를 삶는 것에 1, 20분 정도의 시간이 추가로 걸리긴 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래서 소금과 설탕까지 넣고 푹 삶아낸 감자를 건져다가 버터 두 스푼 정도를 녹인 팬에 집어넣고 표면이 살짝 노릇해질 만큼 구워서 맛있게 먹으면 될 참이었다.


그때 매우 뜬금없이, 얼마 전 생활용품 판매점에 갔다가 사 온 라면스프 생각이 났다.


물론 이 버터감자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휴게소 통감자에는 설탕과 소금을 뿌려먹는 것이 '국룰'이다. 그러나 설탕이나 소금도 뿌리는데 라면스프를 뿌리면 안 될 건 또 뭐가 있겠는지, 맛있는 것 위에 맛있는 것을 뿌리면 더 맛있어진다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는 버터 위에서 한참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는 감자에 냅다 라면스프 하나를 뜯어서 뿌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늘의 버터감자는 살짝 매콤한 맛도 나고 라면스프 특유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극적인 맛도 더해져서 본래의 버터감자와는 사뭇 다른 맛이 있었다. 그것 참 신통하네 하는 감탄을 연신 하면서 만들어온 버터감자를 잘 먹어치우고 한 끼를 때웠다.


국물 끓일 때 뭔가 맛이 좀 심심하면 하나씩 뜯어 넣어 버릇하던 라면스프를 이렇게도 쓸 수가 있는 걸 보니 리조또나 볶음밥 같은 걸 할 때도 좀 써보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런 식이라면 식자재 마트 같은 데서 파는 업소용 대용량 라면스프를 사다가 무슨 조미료처럼 써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럴 거면 그냥 여러 가지 다양한 맛이 나는 시즈닝을 좀 사 보는 게 어떨까 하는 데까지 생각은 순식간에 가지를 쳤다. 하기야 본래 시즈닝이라는 것이 '분말 형태의 양념'을 통칭하는 말이긴 하니까 라면스프 또한 넓게 보면 시즈닝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겠고.


내 손으로 밥을 해 먹게 된 지 3년 만에 라면스프 대신 시즈닝을 좀 사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적어도 그가 바랬던 건 이런 그림은 아닐 것이 분명한데도. 그래도 오늘 해 먹은 라면스프 넣은 버터감자는 제법 괜찮았어서, 그도 먹어본다면 이런 생각은 어떻게 했냐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조금만 더 빨리 생각해 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front_ba56d_9gg1v.jpg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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