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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난 뒤로는 좀 시들해졌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만우절이 다가오면 반 단위로 비상이 걸렸다. 분필 가루를 잔뜩 묻힌 칠판지우개를 문틈에 끼워놓는 고전적인 장난부터 시작해서 반 전체가 교탁을 등지고 뒤돌아 앉아있는다든가 옆반과 작당을 해 숫제 교실을 바꾼다거나 엉뚱한 교과서를 꺼내놓고 시침을 뚝 떼고 다른 과목 수업인 척해서 들어온 선생님을 헷갈리게 만든다든가 하는 장난을 그야말로 '진심으로' 쳤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그런 장난이 좀 도가 지나쳐서, 혹은 그런 장난 따위 안 받아주는 선생님에게 잘못 걸려서 단체기합을 받는 반도 꼭 한두 반씩은 나왔다. 그런데도 그날 하루를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조용히 보내는 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뭐 그렇게 여겨졌던 것 같다. 오히려 역으로 아무 짓도 하지 않음으로써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던 선생님들을 더 신경 쓰이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아마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대놓고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하는 것에 그다지 관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우절 핑계로라도 한 번 대놓고 '까불어' 보고 싶은 심리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뿐이다.
카페의 공지 게시판에는 며칠 전부터 볼드까지 친 아주 살벌한 공지글이 하나 올라왔다. 만우절에 '정치떡밥'가지고 실없이 장난치다가 걸리면 강퇴라는 매우 엄중한 경고였다. 그 아래에는 동감한다는 취지의 댓글들이 주욱 달려 있었다. 올해의 4분의 1이 지나갔는데 넉 달 가까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긴 하다. 다들 지쳐있고 날카로워져 있는 중이니 어쭙잖게 만우절 핑계로 돼먹지 않은 농담을 하다가는 정말로 감정 상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그런 측면에서는 매우 적절한 공고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그렇다. 언제부턴가 내게 만우절은 '농담하는 날'이나 '장난치는 날'이 아니라 '장국영이 죽은 날'로 인식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다. 나는 딱히 장국영의 팬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아름답던 사람이 그런 식으로 허망하게, 일조일석에 세상을 등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나 큰 충격으로 남았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 브런치에서 맞은 두 번의 만우절에 모두 다 장국영 이야기를 썼었고, 그래서 오늘의 글도 원래는 오늘은 장국영 죽은 이야기 좀 안 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글을 쓰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런 글 자체가 이미 또 한 번의 장국영 이야기이기도 해서 올해 만우절도 장국영 이야기 없는 만우절 글 쓰기는 대실패로 끝날 모양이다.
어느 과자 브랜드에서 만우절용으로 이름을 거꾸로 뒤집은 과자를 내놨다는 것 같다. 집 앞 편의점에도 파는지나 슬쩍 한 번 찾아보고 와야겠다. 그리고 어지간히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농담과 안 농담 정도는 구분하니, 제발 이쯤에서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결론 좀 내려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설마 진짜로 나온 뉴스를 퍼오는 것까지 '강퇴'를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