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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당장 내겐 별로 소용이 없는데도 그냥 갖고 있고 싶어서 사게 되는 물건이 있다. 내게는 한 만년필 브랜드에서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낸 '윤동주'라는 이름의 잉크가 그랬다. 당시에 나는 역시나 순전히 그냥 갖고 있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만년필을 한 두 자루 갖고 있었을 뿐 만년필로 그 어떤 글자도 쓰지 않았었는데도, 그 잉크를 보는 순간 그냥 홀리듯이 사버렸다. 이런 게 네이밍의 힘이 아닌가도 생각한다. 이 잉크의 이름이 그냥 평범한 블루블랙이었으면 나는 굳이 그 잉크를 사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뚜껑 한 번 열어보지 못하고 곱게 간수되고 있던 잉크에게 할 일이 생긴 것은 그가 불쑥 떠나가고 난 후로 텅 비어버린 하루를 메꾸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펜글씨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갖고 있는 만년필 중 블루블랙 잉크가 제일 어울릴 만한 만년필을 골라 그 잉크를 넣었고 그때부터 3년 가까이 하루에 A5 다섯 장씩, 꼬박꼬박 뭔가를 쓰고 있다. 물론 그런 것치고 아직도 내 글씨는 예전보다 아주 조금 나아졌을 뿐 마음이 급해지면 또다시 예전의 그 개발괴발한 글씨체로 되돌아가버리긴 하지만.
그 사이 내가 쓰는 잉크는 한 번 멤버가 바뀌었다. 이 '윤동주' 잉크는 45ml여서 다른 잉크보다 15ml 정도가 많다. 그래서 중간에 한 번 바뀐 잉크들이 또 새로 반 병 정도를 더 쓰는 동안도 꿋꿋이 버티고 있더니 어제 드디어 바닥이 완전히 드러났다. 아무리 엎지를 각오를 하고 병을 이렇게 저렇게 기울여 보아도 만년필로 잉크가 빨아올려지지 않아서, 여기까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잉크를 거의 다 써갈 때쯤에서야 후회했다. 명색이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잉크인데 쓰지 말 걸 그랬나, 하고. 물론 이 잉크는 이미 같은 브랜드에서 팔고 있는 블루블랙 색의 잉크에 이름만 윤동주라고 붙여서 내놓은 것에 가깝고(실제로 병이며 박스 디자인까지도 똑같다) 그러니 그 색깔만이 아쉬운 거라면 그냥 지금도 수태 생산되는 그 브랜드의 블루블랙 색의 잉크를 한병 더 사면 된다. 그러나 명색 그래도 윤동주 잉크라는데 쓰지 말고 계속 갖고 있었어야 하나 하는 후회가 뒤늦게서야 들기도 했다. 내가 이 잉크를 들여 쓴 것이 무슨 천하명저도 아니고 기껏해야 엉망진창인 글씨체를 교정하기 위해 쓴 노래 가사나 시구 정도가 고작인지라 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난 3년간 나의 고단한 펜맨쉽을 같이 했던 윤동주 잉크는 어제로 수명을 다했고 '달빛 머금은 강가'라는 예쁜 이름의 한 국산 브랜드 진청색 잉크가 그 후임 노릇을 하게 된다. 소금은 짜게 하라고 있는 것이고 빛은 밝게 하라고 있는 것이니, 잉크의 입장에서야 뚜껑조차 한번 열어보지 못한 채 선반 위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라도 제 소임을 다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정말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미련은 남는다. 이 잉크 다 쓰기 전에 별 헤는 밤이라도 한 번, 이왕 내가 전문을 다 외우는 몇 안 되는 시 중의 한 편이기도 하니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예쁜 글씨체로 써 볼 것을. 난 뭐든 이렇게, 훌훌 보내버리고 난 뒤에야 때늦은 후회를 한다. 안 좋은 버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