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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보라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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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며칠 째 이상하다고 생각 중이다. 밖에 나가보면 날이 꽤 훈훈해졌고 홈트든 침대 정리든 하느라고 좀 움직이면 가끔은 콧잔등으로 찔끔 땀이 맺히기도 하는데 가만히 들어앉아 손가락만 놀려 일을 하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날이 좀 서늘한 것 같다는 생각에 주섬주섬 무릎담요를 끌어 덮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말처럼 갑자기 창밖으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종잡을 수 없는 날씨라는 생각이 드는 며칠이다.


이미 며칠 전부터 떠들어댄 바 오늘은 그의 3주기 제사다. 옛날 식으로 말하면 탈상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지내는 제사인데도 난 아직도 뭘 어떤 순서로 어떻게 하고 어느 타이밍에 술을 따라야 하고 어느 타이밍에 절을 몇 번 해야 되는지도 잘 몰라서 봉안당 제실에 비치된 안내문을 보고 더듬더듬 따라 해 가며 제사를 지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늘어놓겠지. 8년 전 그때 기억하느냐고, 그때 당신과 나는 어느 대형 쇼핑몰에 갔었고 쇼핑몰 여기저기 설치된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이정미 재판관의 주문 낭독을 듣고 잠시 멈춰 서서 하이파이브를 하지 않았었느냐고. 어제 그런 일이 똑같이 또 일어났다고. 그러고 보니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서 평생 칼잡이짓이나 하던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하느냐고, 대통령 같은 거 못하고 하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지 않았었느냐고. 그런 거 보면 당신도 참 웬만큼 똥촉인 모양이라고. 20년을 넘게 같이 살면서 5만 원짜리 로또 한 장 맞는 걸 보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고.


지난 2년 간 4월의 첫 꽃은 무조건 노란 프리지아였다. 그가 갑작스레 떠나버린 후 뭐에라도 홀린 듯 사온 첫 꽃이 노란 프리지아여서 그랬다. 그러나 올해는 앞서 샀던 유찰꽃 패키지에 제철인 프리지아가 이미 많이 섞여있기도 했고 해서, 프리지아는 프리지아라도 보라색 프리지아를 사 보기로 했다. 어제 배송이 시작되었다는 알림이 왔으니 내가 제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집 현관 앞에 꽃 박스가 놓여 있을 것이다.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라는 꽃말이 있는 노란 프리지아와는 다르게 보라색 프리지아의 꽃말은 '존경, 영원한 사랑'이라고 하니 이것도 뭐 오늘 같은 날 꽂아놓기에는 썩 어울리는 듯도 싶다.


늘 이런 글을 쓰면 그에 대한 지청구 혹은 원망, 가끔은 그리움 등등으로 끝을 맺었던 것 같다. 오늘은, 그래도 길다면 긴 지난 3년 간 험한 생각 하지 않고 너무 깊이 삽질하지 않고 그럭저럭 꾸역꾸역 살아남아준 나에게도 그간 수고했고 애썼다는 말을 좀 해주고 싶다. 내가 살아갈 날은 아직 길고, 그 시간 내내 나는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면서 살겠지만.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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