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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잠을 좀 심하게 못 자긴 했다. 별다른 이유가 없는데도 그랬다. 자리에 누운 것은 새벽 두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 깜빡 잠에서 깨 보니 새벽 다섯 시 반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통 잠이 새로 오지를 않아서 두 시간이 넘도록 선잠이 들었다가 다시 깼다가 뒤척거리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여덟 시가 조금 넘어가는 것을 보고 이러고 더 누워있어 봐야 뭐하겠냐는 생각에 그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남들은 내란성 불면증이 귀신같이 싹 나아서 넉 달만에 꿀잠을 잤다는데 나는 왜 이런가 하는 생각을 했다.
비가 올 거라더니 정말 비가 추적추적 왔다. 얼마 전 산불로 온 나라가 난리일 때나 좀 이렇게 내릴 것이지, 뭐 그런 생각을 했다. 꺼내 온 우산을 막 펼치다가, 이 우산이 앞전에 쓰던 우산이 망가져서 작년에 사놓고 어떻게 타이밍이 안 맞아 한 번도 펼쳐서 써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 우산을 쓰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면서 생각보다, 그리고 핸드폰에 표시된 기온보다 실제 날씨가 좀 더 쌀쌀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넋을 놓고 서 있다가 지나가는 차가 튀긴 흙탕물에 날벼락을 맞았다. 그쯤에 도로가 파여 물이 잘 고이는 곳이 있는데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우산 일도 그렇고 내가 비 오는 날은 용케도 피해서 돌아다니고 있었구나 싶었다.
제주 노릇은 올해가 세 번째다. 그러나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번번이 이다음 순서는 뭐였던지, 수저는 어느 방향으로 놓는 건지, 향과 초는 언제 켜고 언제 꺼야 하는지, 퇴주는 언제 하는지, 제실 안에 비치된 안내문이 없으면 아무것도 혼자서는 하지 못한다. 제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에 불을 쓰고 제실 밖에 나와 5분쯤 기다리다가 다시 들어가는 절차가 있다. 문 밖에서 헛기침을 해야 한다는데 깜빡하고 그냥 쑥 들어가 버렸다. 뭘, 당신이 새삼 나를 낯가릴 리도 없고 내가 얼마나 어설퍼 빠진 인간인지 모르지도 않을 테니 좀 봐줘. 그렇게 뻔뻔하게 그의 영정 앞에서 중얼거렸다.
집에 돌아왔다. 아침에 예약 취사를 걸어놓은 밥이 딱 타이밍 좋게 잘 되어 있었다. 미리 끓여둔 카레에 밥을 비빈 것인지 만 것인지 모를 점심을 대충 먹고 치우려니 바깥에 꽃 배달이 온 모양이다. 설거지를 마치고 이 우중에 먼 길을 온 보라색 프리지아(아직 반도 채 피지 않아 보라색이라기보다는 그냥 전체적으로 시퍼렇게만 보인다)를 손질해 꽃병에 꽂아서 그의 책상에 가져다 두었다. 비에 홈빡 젖은 우산을 좀 마르라고 펼쳐두고 비 맞은 옷을 세탁기에 돌려놓는 것까지 하고 나니 갑자기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이 가벼운 몸살기 비슷한 것이 돌았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침대 속에 기어들어가 새우처럼 웅크린 채 한숨 늘어지게 잤다. 그러다가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오후 네 시도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이대로 몸살이라도 크게 나는 건가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아마도 어젯밤에 잠을 설친 후폭풍이었던 게 아닐까. 그제야 어쩌면 전날 밤 잠을 설친 것은 다음날이 그의 제사였기 때문이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를 떠나보내고 반쯤 넋을 놓고 지내던 시절 몇 군데 점사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때 들은 말들은 대충 비슷했다. 남편 유품 지금 당장 정리하는 거 너무 힘들면 조금 더 갖고 있어도 된다고. 그런데 웬만하면 1년은 넘기지 말고, 3년은 정말 넘기지 말라고. 산 사람이 보내줘야 망자도 훌훌 떠나서 좋은 데로 가는 거라고. 그런데 어떡하나. 세 번째 제사까지 지냈는데도 나는 아직도 그의 물건을 거의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냥 가슴만 좀 먹먹할 뿐 새로 눈물까지는 나지 않아서, 3년의 시간이 그에게뿐만 아니라 내게서도 흘러갔음을 깨닫는다.
나의 3년상은 그렇게, 어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