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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석 달 여의 시간 동안 그때 그러지 않았으면 지금 어떡할 뻔했나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드는 일이 몇 가지가 있다.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것도 물론 그중 하나다. 작가 승인이 마침 그 타이밍에 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하루에 한 번 아직도 채 익숙하지 않은 이 아침 시간에 그날 분의 청승을 풀어내 놓는 이 작업을 하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나는 아마 꽤 많이 병들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일 중 하나가 그의 차를 정리하다가 그의 사진을 찾아내 재인화를 해둔 일이다.
현재 우리 집에는 총 세 군데에 그의 액자가 걸려 있다. 내가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책상의 모니터 옆에 사진 액자가 있고, 그 액자를 가지고 그린 초상화 액자 두 개가 거실 벽과 침대 옆에 있다. 우리 집은 소설에나 나오는 아흔아홉 칸 고대광실이 아니고, 그래서 어지간하면 어디서나 눈만 돌리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게끔 나름 머리를 쓴 배치이다.
초상화 액자는 그의 사진을 가지고 그린 것이므로 기본적으로는 같은 포즈에 같은 얼굴이다. 그러나 사진과 초상화는 그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했지만 초상화는 다분히 그리신 분의 '미화'가 많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초상화 속의 그는 내가 기억하는 실제의 그보다 안색도 좋고 날씬하고 잘생겨 보인다. 그리고 엷게 웃는 얼굴이다. 20대 시절 한참 콩깍지가 씌어 지내던 그때의 얼굴과 좀 비슷하다고 하면 될까. 대신 그 초상화는 언제 어떤 기분으로 봐도 늘 같은 얼굴이다. 그는 언제나 내가 걸어둔 그 자리에서 똑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내 기억의 어느 편린처럼.
그런데 책상에 놓아둔 사진 액자는 조금 다르다. 이 사진 액자는 그가 운전면허 갱신을 하기 위해 부랴부랴 찍은 것으로, 보정 같은 걸 하지 않아 그의 실제 얼굴과 거의 똑같다. 뺨에는 잡티가 남아 있고 파르스름하게 올라온 수염자국도 그대로 보이며 입을 꾹 다물어 생긴 턱의 주름까지도 고스란히 찍혀 있다. 사진 속의 그는 그냥 지난 세월 내 옆에서 숨 쉬고 살아가던 그의 모습이다. 특별히 잘난 것도 멋질 것도 없는. 그런데 이 사진은 날마다 표정이 조금씩 다르다. 어느 날은 초상화처럼 웃고 있는 것도 같고 어느 날은 조금 화가 난 듯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매우 슬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게 실제일 리는 없겠고, 그냥 그날그날의 내 기분이 투영돼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 그런데 그 '투영'이 초상화에는 일어나지 않고 사진에만 일어난다는 사실은 가끔 좀 흥미로울 때가 있다.
아무와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나날도 더러더러 있는 와중에,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그의 사진 액자를 향해 쓸데없이 말을 거는 걸로 그날의 소통 욕구를 채운다. 나가게 되면 어디에 무슨 일로 나가고 몇 시쯤 올 거라는 말을 하고, 레시피를 검색해 새로 만들어본 음식을 책상 앞으로 가져와 먹으면서는 뭐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한데 다음번에 할 기회가 있으면 굴소스를 좀 넣어야겠다는 둥 간장을 조금 덜 넣어야겠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한다. 이제 겨우 7월 초인데 날씨가 이렇게 더워서야 올여름 어떡할지 모르겠다는 말, 요즘 살이 좀 빠져 입고 다닐 옷이 없어서 옷을 좀 샀다는 말, 오늘 백중 기도를 하러 절에 갔는데 초제때보다 사람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많더라는 둥의 시시콜콜한 말을 그의 얼굴을 보면서 한다. 나는 그렇게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고, 그래서 정작 그가 내 옆에 있었을 시절에는 이렇게까지 소소한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그날그날 그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 보이는 건.
오늘 아침의 그는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풀리긴 했지만 여전히 내게 뭔가 앙금이 남은 듯한 얼굴이다. 왜. 뭐가 문젠데. 그렇게 물어봐도 물론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여전히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4월의 어느 날 그의 차를 정리하던 중에 이 사진 한 장을 찾아낸 것은. 갑작스러운 이별을 미처 알려주지 못한 것에 대한 그 나름의 아주 작은 사과일 것이라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