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할 만큼 유명한데도 정작 나는 못 보고 지나가는 영화들이 가끔 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타이밍을 놓친 것들은 웬만해서는 그대로 못 본 채로 남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주로 이런 식이다. 그 영화를 모르면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가 되는 타이밍에, 나는 이런저런 구구절절한 이유로 그 영화를 보지 못한다. 나중에라도 한 번 보려는 마음을 먹어 보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그 영화에 대한 너무 많은 정보들-스토리라든지, 나오는 인물들의 캐릭터라든지, 심지어는 창작자가 회심의 일격으로 준비해 놓은 반전까지도-을 음으로 양으로 알게 되어버려 실제로 그 영화를 본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게 되고, 결국 그런 마당에 굳이 시간을 내서 봐야 하나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타이밍 놓친 영화들 중에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가 있다.
'러브레터'의 경우는 조금 사태가 심각하다. 나는 이 영화의 스토리를 잘 모른다. 어떤 인물이 나오는지도 잘 모른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온통 눈이 내린 설원의 풍경과, 그 풍경의 어딘가를 향해 손나팔을 하고는 그 유명한 대사-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お元気ですか! 私は元気です!)하고 외치던 여주인공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뿐이다. 이쯤 되면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십 년 된 영화를 굳이 다시 봐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은 웬만해서는 잘 가시지 않는다. 그럴 시간이 있고 용기가 있다면 몇 년을 기다려왔고 최근에야 개봉한 '주라기 공원'의 완결판을 보는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
영화의 명장면, 혹은 명대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스토리의 맥락 속에서만 기능하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부분만을 뚝 잘라서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봤을 때도 명장면 명대사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러브레터'의 그 유명한 장면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영화를 보지 않은 나로서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다가 하필이면 저런 안부인사를 외치는 장면이 어째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만하면 여기저기서 언급될 정도의 명장면인지를 잘 알 수가 없다. 이건 아마 내가 '러브레터'의 스토리를 사전적으로 다 알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영화를 다 보고 그 스토리 자체에 몰입하지 않는 이상은 내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책상에 있는 그의 사진 액자를 향해 가장 많이 한 말은 '잘 있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안부를 묻듯이, 잘 있는지,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나 보고 싶다고 울고 그러진 않는지. 그런 말들을 한다. 그리고 사실 그게 제일 궁금하다. 거기선 어떻게 지내는지가. 인세를 벗어난 그곳은 아픔도 슬픔도 없는 곳이라 정작 그곳으로 떠난 이들은 여기서 슬퍼하는 남겨진 사람 따위는 다 잊어버린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정말로 그런 건지.
안부를 묻는다는 건 정말 그렇다. 분명히 실재하지만 잠깐 내 곁에 있지 않은, 그리고 내가 그의 생활을 궁금해 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있는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실재하지 않는 인물에게는 안부를 궁금해할 수 없고 나와 가깝지 않은 인물에게는 안부를 알고 싶어 할 필요가 없다. 잘 지내냐고 물어보는 행위는 사실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행동인지도 모른다. 청승과 기괴함과 의연함의 딱 경계선에 걸쳐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련함도 아니고, 떠난 사람을 어떻게든 내 곁에 붙잡아놓겠다는 집착도 아니고, 그렇다고 훌훌 다 잊어버리는 무심함도 아닌, 적당한 수긍과 적당한 체념과 적당한 자기 합리화가 뒤섞인 딱 그 중간의 어딘가.
지금이 겨울이라면. 그래서 영화 속의 그곳만큼 발이 푹푹 빠질 만큼 눈이 온다면. 그리고 소리를 좀 질러도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지 않는다면. 나도 한 번쯤은 눈 내리는 하늘을 향해 손나팔을 하고 소리쳐 물어보고 싶다. 당신 거기서 잘 지내냐고. 나도 나름 잘 지내고 있다고. 가끔 슬프고 외롭고 힘들지만, 그래도 비교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