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안 그러기로 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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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집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가면 가구와 생활 소품 등을 파는 것으로 유명한 한 다국적 기업의 매장이 있다. 그 정도의 거리는 '마실'을 가기에 딱 적당한 거리여서 그와 나는 종종 뭔가를 산다는 목적이 아니라 기분전환 겸 뭔가를 '구경'하러 그곳에 가곤 했다. 꾸며진 쇼룸도 둘러보고 눈이 핑핑 돌 정도로 태산같이 쌓여있는 물건들을 이것저것 들었다 놓았다 해보고 행주나 머그컵, 쿠션 커버 같은 소소한 물건을 몇 개 사고 마지막으로 핫도그를 하나씩 사 먹고 넓은 매장 안을 쏘다니느라 소모된 열량 보충 겸 잠깐 앉아 지친 다리를 쉬다가 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루틴이었다.


그렇게 업어온 물건들 중에 비이커 모양 계량컵이 있다.


이 매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사실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의 취향에 들기에 이곳의 물건들은 너무 스트레이트하고 밋밋한 디자인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물론 반대로 그 지점은 내 마음에는 상당히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파는 물건들 중 몇몇 가지는 바깥에서는 도저히 나오지 않는 가성비로 유명했다. 그 계량컵 또한 그런 물건들 중 하나였다. 일단 가격부터가 다른 데서 파는 계량컵의 반도 안되었으니까. 용량이 500ml라지만 여분이 넉넉해서 그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 들어갔다. 처음엔 그저 밋밋하게만 느껴졌던 비이커 모양 디자인도 자꾸 보다 보니 어린 시절의 과학 시간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나름의 애교가 있었다. 우리는 그 계량컵을 사다 놓고 참 다양한 용도로 애용했다. 본래의 용도인 액체를 계량하는 것 말고도 보리차나 쌀 같은 것을 통에 부어 놓을 때라든가 모카포트에 내린 커피를 드리퍼로 한 번 더 거르기 위해 1차로 따라놓는 용도라든가 가끔 아인슈페너를 만들어 먹을 때 거품 낸 생크림을 담아서 따른다거나 하는 등등. 요즘은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끓여먹는 라면의 물 양을 잡는 데도 쓴다. 우리 집엔 꽤 많은 종류의 다양한 컵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바쁜 것은 단연코 그 계량컵이었다.


어제 외출했다 돌아와 점심을 먹고 마실 냉차를 미리 타서 냉장고에 넣어두려고 계량컵을 꺼냈다가, 나는 컵의 아래쪽에 실금이 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워낙에 자주 쓰는 컵이다 보니 어딘가에 툭 부딪혀 깨지지까지는 않고 금이 가 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잘하는 말 중에 '모르고야 써도 알고도 어떻게 쓰느냐' 하는 식의 말이 있는데 딱 그 기분이었다. 그 금이 눈에 안 띄었으면 몰라도 뻔하게 금이 간 걸 알고도 계속 쓸 수는 없었다. 금이 가버린 컵이나 그릇은 재활용하기도 애매하다. 나는 미련 없이 몇 년간이나 잘 쓰던 계량컵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렸다.


워낙 자주 쓰는 물건이라 없으면 당장 내가 불편할 판이어서 새로 사야 했다. 인터넷 창을 켜면서 나는 다시는 유리로 된 계량컵을 사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왜 있잖아. 플라스틱이라든지. 스테인리스라든지. 그런 걸 사야 막 쓰지. 그렇게 나는 두세 종류의 후보 상품을 골라놓고 한참이나 고민에 빠졌다. 재질. 용량. 배송비.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비교해 가면서.


그리고 나는 장고 끝에 원래 쓰던 것과 같은 브랜드의 같은 상품을 다시 주문했다.


원래 쓰던 계량컵에 워낙 정이 들어서.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던 물건이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계량컵은 생각보다 비쌌고, 늘 쓰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면 그것에 적응하느라 또 한 며칠 걸릴 테니까. 내심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본다. 그러나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그냥 나는 계속 그 시간에 마물러 있고 싶은 모양이다. 그가 아직 내 곁에 있고, 계량컵이 멀쩡하던 그 어느 날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 모양이다. 유리로 된 계량컵 같은 건 다시는 안 사기로 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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