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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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그가 떠나고 난 후 가장 견디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집안의 적막이었다. 말을 해도 되돌아오는 대답이 없다는 사실은 가장 실제적으로 와닿는 그의 부재였다. 외로움과 공허함을 견디다 못해 혼잣말이라도 했을 때, 텅 빈 집안의 공기 사이로 허망하게 퍼져나가는 내 목소리를 내 귀로 듣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 적막을 견디다 못해서 나는 결국 텔레비전을 하루 종일 틀어놓기로 했다. 슬프지 않은, 적당히 시끄러운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그의 마지막 며칠간, 불과 며칠 후 이런 일이 생길 줄 모르고 그와 함께 봤던 프로그램은 될 수 있으면 보지 않고 싶었다. 그가 끔찍하게 싫어했던, 특정한 톤의 목소리가 복잡한 약관을 속사포처럼 읽어대는 보험 광고와 상조 광고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iptv를 사용한 이후로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어느 예능 채널의 정액제에 가입하고 그 채널의 간판 프로라 할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 하나를 시즌 1의 1편부터 주욱 연달아 틀었다.


이미 햇수로 6, 7년 전에 처음 방송된 그 프로그램은 일종의 타임캡슐과 같았다. 나는 잠시나마 내게 닥친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잊고, 늘 보던 얼굴이라 그 얼굴이 그 얼굴 같던 몇몇 유명한 연예인들도 몇 년 사이에 얼굴에 주름이 늘고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실감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견 위로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씁쓸했던 것은 시즌 2부터 출연하기 시작한 한 출연자였다.


시즌 2가 방송되던 무렵 그는 연애 중이었다. 온 국민이 다 알 정도의 공개 연애였다. 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 그들의 조합은 마치 현실로 튀어나온 로맨스 소설 같았다. 그는 많지 않은 분량을 쪼개가며 깨알같이 연인에 대한 애정을 늘어놓았고 연인과 통화를 하기 위해 샤워부스 안에 한 시간이나 들어가 있기도 했다. 다른 출연자들 모두가 그의 그런 행동을 흐뭇해하며 바라봤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결혼했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로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데리고 나와 함께 도망치는 장면으로 유명한 영화 '졸업'의 진짜 엔딩 장면은 함께 도망친 두 사람이 버스에 올라 어딘가로 도망치는데 그 환희에 가득 찼던 얼굴에서 조금씩 웃음기가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들의 결혼생활 또한 그러했다. 둘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이혼했다. 그리고 그 이혼의 전 과정은 그들의 연애가 그러했듯 전 국민에게 생중계되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퍼부은 날카롭고 뒤틀린 말들이 매일 같이 인터넷의 실검에 오르내렸다. 그런 길고 지루한 다툼 끝에, 그렇게나 사랑했던 그들은 결국 헤어져 남이 되었다.


그 모든 일들을 다 알고 한참 사랑하던 당시를 지켜보는 마음은 복잡했고 씁쓸했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들은 서로 사랑했을까. 그 좋았던 나날이 고작 몇 년밖에 지속되지 못할 것을 알았더라면. 그리고 그 질문은 나에게도 똑같이 되돌아왔다. 그가 내 곁에 고작 9834일밖에 살지 못할 것을 열아홉 살의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그를 피해 갔을까. 그를 내 인생에 들여놓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을 것 같았다. 그가 지금 내 곁을 떠나갔다 해도 그가 내게 남긴 9834일의 시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지금의 가슴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그 시간들을 모두 지워야 한다면 나는 선뜻 그러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가 내게 남겨준 이별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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