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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반쯤은 충동구매했던 연보라색 블루칩 장미는 꼭 일주일을 갔다. 꽃의 수명과는 별개로 유독 시드는 기색이 확 드러나는 꽃들이 있는데 장미나 리시안셔스같이 많은 꽃잎들이 층층이 감싸고 있는 형태의 꽃들이 좀 그런 것 같다는 나름의 견해가 생겼다. 역시나 억지로 두고 보면 2, 3일은 더 볼 수 있겠으나 그의 책상에 둘 꽃을 시든 채로 놓아두고 싶지 않아 일주일 만에 다시 꽃집에 갔다.
지금 꽃이 장미, 그 앞이 리시안셔스, 그 앞이 또 장미였으니까 이번엔 좀 수수하고 파릇파릇하고 소박한 꽃으로 사 와야겠다. 그렇게 결심했다. 크고 화려한 꽃이 좋아 보여도 그런 꽃들만 자꾸 보다 보면 작고 수수한 꽃들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일전의 안개꽃이나 시네신스 같은 그런 꽃들. 사람의 일이란 또 모르는 법이라 정작 꽃집에 가서 쇼케이스를 보게 되면 또 지금의 블루칩 장미처럼 다른 꽃에 정신이 팔려 덥석 사 오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런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내 조건에 맞는 꽃은 두 가지 정도가 있었다. 하나는 몇 달 전에 사다 꽂아놓았던 옥시페탈룸 블루스타였고 다른 하나는 또 처음 보는 꽃이었는데 마치 소나무 잎 같은 가늘고 삐죽삐죽한 이파리 사이사이로 손톱만 한 작고 하얀 꽃이 잔뜩 피어 있었고 그 꽃대는 마치 풀이 아닌 나뭇가지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걸로 할게요. 두 번째의 그 처음 보는 꽃을 고르자 사장님은 꽃을 한 줌 들어다 잔가지를 치고 곁잎을 정리해 주셨다. 이 꽃 이름은 왁스 플라워라고 하는데 향도 좋고 오래 가요. 요즘은 안개꽃 대신 이걸로 꽃다발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어차피 누구 줄 것도 아니고 집에 꽂아놓으려고 한다는데도 사장님은 늘 비닐까지는 아니라도 예쁜 포장지에 정리한 꽃을 싸서 묶어주곤 하신다. 꽃이라는 게 다 그 순간의 기분인데 아무 데나 싸서 팔면 안 돼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계산을 마치고 나오려던 참이었던 돌아서던 나를 불러 세운 사장님은 업장 구석에 있던 냉장고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써내더니 신문지에 한번 감싸서 봉지에 넣어 주셨다. 복숭아예요. 식구 중에 농사짓는 사람이 있거든요. 먹을만하더라고요. 이 때아닌 호의에 얼떨떨해진 나는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고 복숭아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풀어보니 제법 큼직한 복숭아가 세 알 들어 있었다. 과일 치고 싼 것은 없지만 복숭아는 그중에서도 비싼 편이다. 졸지에 나는 오늘 지출한 꽃값 이상의 복숭아를 받아온 샘이 돼 버렸다.
장을 볼 때 그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품목 중의 하나가 과일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내게 매일 조금씩이라도 과일을 먹이고 싶어 했다.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영영 안 먹게 되는 음식'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과일은 대개 비쌌고, 양이 적었고, 설령 싸다 한들 한꺼번에 많이 사다가 재어놓을 수도 없는 물건이다. 그래서 그는 그 과일을 사는 일로 장을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당연히 내가 장을 보게 된 지난 4월 이후로, 과일은 우리 집 냉장고에서 사라졌다. 그의 말마따나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영영 안 먹게 되는 음식'이라 그랬을 것이다. 나는 나 혼자만을 위해 싸지도 않은 데다 양도 적고 많이 사다 재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걸로 끼니를 때울 수 있지도 않은 과일을 사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과일을 먹는 것은 그가 떠난 이후 처음이었다. 사장님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아마 앞으로도 영영 먹을 일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
창밖엔 비가 왔고, 어쩔 수 없이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었다. 그리고 껍질을 벗기고 잘라온 복숭아를 한 조각씩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먹을만하다더니 맛은 있네. 그러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몇 달 전의 나는, 몇 달 후의 내가 우리 동네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꽃집의 사장님에게서 복숭아를 얻어와서 이렇게, 혼자 깎아서 먹고 있게 될 줄 알았을까. 그리 길지도 않은 서너 달의 시간 사이 내 인생이 원래의 궤도에서 너무나 많이 이탈해 버렸다는 실감이 들었다. 나이가 40을 넘어가면서 사람의 인생이란 대개 뻔하고 어제 일어난 일은 오늘도 일어나게 마련이며 오늘 일어나지 않는 일은 보통은 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건 어설프게 나이 먹은 인간의 오만이었다. 생은 언제나 예측불허라 그 의미를 지닌다는 어느 오래된 만화책에 나오는 말처럼.
조금 더 힘을 내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