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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용건이 없으면서 누군가에게 매일 전화를 해 안부를 묻는다는 건 대단한 마음씀을 필요로 한다. 심지어 우리를 낳아준 부모님에게조차 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오죽하면 공익 광고 캠페인으로 부모님께 자주 전화드리자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내게는 그런 지인이 한 분 계신다. 출근길에, 퇴근길에 거의 매일 전화를 해 밥은 거르지 않고 먹었는지, 더운 날에 잘 지내는지, 요즘은 뭘 하고 사는지를 이것저것 물어봐 주신다. 이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별다른 용건이 없으면서 누군가에게 매일 전화를 해 안부를 묻는다는 게 얼마나 마음을 써야 하는 일인지를. 그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에게 하는 혼잣말 정도 외에는 입을 열어 말을 할 일이 한 마디도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즘에서야.
내 쪽에서 할 말은 그리 많지 않다. 내 일상은 요즘 차마 누군가에게 뭐가 어쨌다고 말하기조차 힘든 아주 기초적이고 단순한 루틴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며칠 새 부쩍 아침저녁으로 날이 선선해졌다는 둥, 좀 있으면 추석이라 그런지 물가가 많이 올랐다는 둥, 살이 많이 빠져서 전에 입던 옷들이 하나도 안 맞는다는 둥 하는 것들이 전부다. 그래서 나는 실감한다. 사람의 스토리텔링은 결국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구나, 하고. 그 인간관계가 단절돼 버린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하나마나한 신변잡기밖에는 나올 것이 없구나 하고.
반면에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계시는 지인 분에게는 이야기할 거리가 넘쳐난다. 얼마 전 결혼한 딸 이야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놓고 아직도 제 자리를 못 잡은 아들 이야기, 손 많이 가는 막내딸 이야기 등등.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도대체 왜 그러는지 속을 알 수 없는' 남편 이야기다. 스펙트럼은 아주 다양하다. 몇 년 전 있었던 모종의 일로 지인 분이 좋지 않게 보고 있는 친구의 편역을 들다가 다툰 이야기, 길거리 좌판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할머니가 안됐다면서 싱싱하지도 않은 채소를 다 산 것까지는 좋은데 갖고 있는 현찰이 없다고, 당신이 집에 가서 지갑 좀 가지고 오라고 시키더라는, 낯을 내고 싶으면 본인이 갔다 올 일이지 왜 날더러 시키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해놓고 카톡을 차단했더라는 이야기 등등. 나보다 한참이나 어른이신 것 같던 분들도 싸울 땐 이렇게 싸우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끔 웃을 때가 있다.
그리고 가끔은, 열 번에 한두 번쯤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필이면 나를 붙잡고 하시는 걸까 싶은 생각에 씁쓸해질 때가 있다.
그와 나도 자주 다퉜다. 우리는 둘 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러니 거의 만 24시간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서 지냈다. 그러자니 자연히 다툴 일도 잦아졌다. 다투고 나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내는 나날이 며칠씩 갈 때도 있었고 그런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누구는 성질 낼 줄 몰라서 안 내는 줄 아느냐고 입 속으로 연방 튀어나오는 역정을 꾹꾹 눌러 삼킨 날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러던 날들조차 지금 돌이켜 보기엔 다신 돌아오지 못하는 봄날일 뿐이다. 화가 나 있어도, 뚱한 채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섞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내 옆에 돌아와 있기만 하다면 뭘 더 바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가끔 지인 분의 하소연 아닌 하소연은 이걸 지금 날더러 어떻게 들으라는 이야기인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고가 나서 다리 한쪽이 잘려나간 사람에게 어제 신발을 사러 갔더니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못 사고 그냥 왔다는 말을 하는 듯이, 뭐 그렇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전화를 끊고 나서 알 수 없는 언짢음에 입맛이 씁쓸해졌던 기억도 몇 번이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분의 선의를 믿기 때문이다. 나 하나 거천하기에도 바쁜 이 세상을 살면서 별다른 용건이 없으면서 누군가에게 매일 전화를 해 안부를 묻는다는 게 얼마나 마음을 써야 하는 일인지 이젠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괜히 해서 언짢아지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말자고 생각해 본다. 언제 어떻게 끊어질지 모르는 모든 인연에 감사하자고. 내게 주어진 가장 커다란 인연은 이미 그런 식으로 놓쳐버렸지만, 남은 것들만이라도. 우리는 언제 어떤 식으로 헤어지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