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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ug 28. 2022

불가역不可逆

-138

더위가 한 풀 꺾였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이다. 브런치에도 8월 15일만 지나가면 물이 차가워져 바닷물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느니 하는 말을 쓴 기억이 나니까 열흘 남짓이 겨우 지난 모양이다. 그때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여름 날씨의 변덕이라고만 생각했다. 왜, 가끔 그런 일이 있듯이. 봄이 오고, 이제 겨울은 정말 끝났다 생각해서 입던 겨울 코트와 패딩 따위를 드라이클리닝까지 해서 다 싸 넣어 버린 후에 뒤통수를 때리듯이 찾아오는 추위처럼. 어차피 올해도 9월까지는 더울 거고, 그러던 중간에 잠깐 쉬어가는 타임인 거겠지. 고작 이 정도로 경계심을 풀기에는 근래의 여름은 길고 끈질겼다. 그래서 나는 입으로는 아 이제 더위가 한 풀 꺾였다 말하면서도 내심 이렇게 올여름이 끝날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8월도 채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들켜버린 서프라이즈는 생각보다 별로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벌써 사흘째, 나는 새벽에 '추워서' 잠에서 깼다. 지금 우리 집 침대 위에 깔려 있는 이불은 작년에 장만한 얇은 인견 이불이다. 이불이라기에는 얇은 천 한 장에 가까운 그것을, 나는 필사적으로 둘둘 말고는 잔뜩 웅크린 채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날씨가 정말 미쳤다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얇은 이불조차 거추장스러워서 있는 대로 다 걷어차고 잤었는데 이젠 이렇게 둘둘 말고서야 겨우 잠들 수가 있다니.


새벽에 잠을 설친 결과 나는 오늘 30분쯤 늦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늘 하던 청소를 하고 자리에 앉아 글을 쓰면서 내다본 창 밖의 하늘은 벌써 가을 하늘 티가 나고 있다. 하늘의 색깔은 계절마다 다르다. 똑같은 색깔인데 내게만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색깔은 더 이상 여름의 색깔이 아니다. 그리고 아직 8월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식어버린 기온과 쨍하게 높아진 하늘은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올여름은 정말 이렇게 끝나버린 건가. 그러나 이제 와서, 이렇게까지 온도가 식어버렸는데 다시 얼마 전처럼 밤 기온이 25도를 넘기고 선풍기로는 답이 없어 에어컨을 켜고 잠들어야 하는 날이 돌아오리라고는 아무래도 생각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날씨가 미쳤고 지구 온난화가 미쳤다지만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조금은 숙연한 기분으로 아무래도 올여름은 이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가버린 것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가 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식어버린 날씨도 다시 더워지지 않는다. 어느새 저만치 가버린 계절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네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언제까지나 어린애처럼 떼를 써도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없던 걸로 되지 않는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 지나간 봄 네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를 놓아주라고. 이미 봄이 지나고, 여름마저도 지났다고.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생떼를 썼으면 너도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고. 그러니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고.


그러나 아직은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식기 시작한 계절은 가속이 붙을 테고, 이제 얼마 후면 더워서 못 살겠다는 말 대신 추워서 못 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시간이 돌아올 테지. 비 대신 눈이 내리고 에어컨 대신 보일러를 껴안고 살아야 하는 나날이 돌아오면, 나는 혼자 보는 첫눈에 눈물을 흘릴 테고 낙엽이 다 져버린 거리의 나무들에 한숨을 쉬겠지. 지난여름 내내 불쑥불쑥 치밀던 그 슬픔들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온다고 해서 멀쩡해질 것 같지는 않다.


흘러가버린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건 진리일 것이다. 그냥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 자리에 멈춰 서서 떼를 쓰고 싶다. 아직은 아무것도 순순히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아직 이 만큼밖에 지나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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