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괜찮아, 먹어도 안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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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식사와 간식을 막론하고 우리 집의 먹거리는 대부분 그의 소관이었다. 어떤 것을 사 와서 그중 무엇을 언제 어떻게 먹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가 알아서 관리했다. 밥도 그랬고 간식도 그랬으며 하다못해 밥을 먹고 나서 마시는 차 한 잔조차도 그랬다.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 뭔가를 먹거나 마시는 것은 최소한 그의 사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우리 집의 먹거리들 중 내 소관인 것이 딱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원두커피를 사는 것이었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원두들을 조금씩 사다가 먹어보는 것을 좋아했고 이번에 어떤 원두를 얼마나 살 것이냐는 내가 알아서 하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그가 떠나기 얼마 전에도 나는 오랜만에 오빠가 좋아하는 파나마 커피를 좀 먹어 보자며, 그러나 파나마 게이샤는 너무 비싸서 그냥 산지만 비슷한 파나마 SHB를 샀다고 그에게 말했었다. 그가 이렇게 불쑥 떠날 줄 알았더라면 무리해서라도 파나마 게이샤를 살 걸 그랬다는 후회를, 나는 아직도 가끔 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집에서 굽는 빵-소위 홈베이킹을 하는 것이었다.


쓰던 전자레인지가 고장이 나서 버리고 새것을 사는 대신 작은 오븐 하나를 들인 후 나는 가끔 인터넷을 뒤져 초보자도 함직한 제빵 레시피를 찾아 오븐에 빵을 구웠다. 집에서 금방 구운 빵이라는 것 외에는 우리가 사다 먹는 그 난다 긴다 하는 빵집의 빵들보다 맛있을 리가 없고 결정적으로 모양은 엉망진창인데도 그는 내가 구운 어설픈 빵들을 맛있게 먹어주었다. 브라우니라든가, 컵케이크라든가, 바스크 치즈 케이크 같은 것들을.


그리고 그가 떠나기 얼마 전, 나는 우리가 종종 사다 먹는 소금빵을 집에서 구워보는 것에 꽂혔다. 그래서 밀가루를 사고, 이스트를 사고, 버터를 샀다. 우리 집에서 요리를 할 때 쓰는 버터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식물성 버터였고, 내가 조금만 더 베이킹에 능숙했더라면 아마 버터를 따로 사지 않고 그걸로도 충분했겠지만 나는 장비빨과 재료빨에 의존하는 쌩초보였으므로 무조건 나가서 버터를 따로 샀다. '진짜' 버터는 가격이 제법 비싸서 그렇게 재료를 다 사고 나니 차라리 근처 빵집에 가서 소금빵을 사 먹는 것보다 두세 배는 비싼 가격이 나왔다. 괜찮아. 앞으로 몇 번 더 해 먹으면 본전이야. 그렇게 큰소리를 탕탕 치는 나를 보며 그는 웃었었다. 며칠 후, 무슨 일이 일어날 건지 미리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물론 그날 만든 소금빵은 역시나 내가 한 빵답게 모양은 엉망이었고 맛도 어딘가 어설펐다. 그래도 그는 첫 솜씨에 이 정도면 훌륭하다며 그 빵들을 맛있게 먹어 주었었다.


어제 배송되어 온 마트 물건들을 정리해 냉장고에 집어넣다가, 나는 문득 그날 샀던 버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통기한은 지난 7월 22일까지였으니 이미 유통기한이 한 달도 지난 셈이다. 이걸 어떡하나.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결국 그 버터를 버리지 못하고 냉장고에 다시 넣어놓았다. 어차피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안 꺼내고 냉장고 안에만 넣어놨는데 뭐. 괜찮아. 먹어도 안 죽어. 먹고 죽으면, 뭐 그것대로 좋고. 마지막쯤에서, 눈에서는 눈물이 터지고 입에서는 실소가 터졌다.


어설프게 구운 소금빵을 갖다 놓고 그의 눈치를 살피던 그날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추적추적 비가 오는 월요일 아침에, 나는 그런 청승맞은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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