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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가야 할 고향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내야 될 차례가 있는 것도 아닌 나의 추석은, 그냥 연휴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 같다. 제사를 지내야 하나 하는 감당 못할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왠지 설 추석에 제삿밥 얻어먹는 처지가 되었다고 하면 그는 썩 유쾌해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를 모셔놓은 봉안당에서는 얼마 전 추석 기간 중에는 방역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제례실을 오픈하지 않으니 양지 바란다는 친절한 안내 문자가 왔다. 이래저래 그는 나의 명절증후군을 결사반대하는 모양이다. 그의 성격상 충분히 그럼직하기도 하고.
그래서 평범한 금토일월 4일 연휴에 불과하게 되어버린 나의 추석에, 그래도 송편은 한 번쯤 쪄서 먹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 아직 때가 되지 않은 마트 주문을 조금 하기로 했다. 그가 있을 때는 송편도 두 가지 종류로, 흰 것과 색깔이 나는 것으로 두 봉지를 사다가 섞어서 쪄서 먹었지만 이젠 그럴 정성도 필요성도 없어서 그냥 단출한 흰 송편 한 봉지만 사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 8천 원 남짓한 송편 한 봉지를 사기 위해서 또 최소 주문금액 맞추기를 하기 시작했다. 웃기는 일이다. 배송비 3천 원을 추가로 무는 것이 아까워서 3만 2천 원어치 물건을 더 사게 된다는 건. 물론 다 조만간 필요해질 물건이기는 하다지만.
다음 주 식단을 보고 사야 할 식재료 몇 가지를 담았다. 그러나 그래 봤자 몇천 원 남짓이었다. 마트에 주문을 하면 기계적으로 사는 몇몇 품목들-생수, 물티슈, 요거트 같은 것들을 담아봤자 금액은 2만 원을 채 넘기지 못했다. 아직은 쌀도 살 필요가 없고 샴푸나 린스 같은 것도 살 필요가 없었다. 어떡한다. 그냥 눈 질끈 감고 이대로 주문할까. 그러나 어디 가서 커피 한 잔 사 먹을 돈밖에 안 되는 그 3천 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혹시나 이 3천 원을 아낄 수 있는, 조만간 사야 할 뭐 기가 막힌 물건이 없을까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나는 온 집안을 빙빙 돌며 떨어진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휴지를 좀 살까.
코로나 초기 무렵, 미국이나 유럽의 마트에서 다른 식료품도 아닌 휴지가 품절돼 난리가 나는 걸 보고 그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아니, 휴지를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왜 다들 휴지 가지고 저 난리들이지?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뭐랄까 먹는 건 아닌데, 되게 사람으로서의 존엄이랄까 그런 거에 연관돼 있는 품목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휴지는 짐승은 안 쓰고 사람만 쓰잖아. 그러니까 휴지를 못 쓰게 되는 순간 동물과 같은 레벨이 된다는 그런 공포감 같은 게 있는 게 아닐까. 나만 해도 집에 휴지 떨어져 간다 싶으면 굉장히 스트레스받거든. 생각해 보니 그럴싸한 대답이었다.
가끔 인터넷에 어처구니없이 싼 가격으로, 심지어는 1+1로 파는 두루마리 휴지 상품을 발견하고 불문곡직 무조건 사 버릴 때가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휴지인데, 있으면 다 어떻게 써도 쓴다는 핑계를 대고. 그렇게 산 휴지는 대개 몹시 얇거나 헐렁하게 감겨 있어서 매우 헤프게 써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 역시 싼 게 비지떡이라고, 다시는 너무 싸게 파는 휴지는 안 살 거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래 놓고도 나는 비슷한 가격의 비슷한 수준의 비슷한 상품에 어김없이 또 낚이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 싼 게 비지떡이라고, 휴지는 정말 돈 좀 주더라도 쓸만한 걸 사야 한다는 비슷한 레퍼토리를 또 중얼거렸고 옆에서 그는 소리 없이 웃으며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휴지는 예닐곱 개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 혼자 쓸 거라면 다음번 마트 주문을 할 때 사면 딱 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인즉, 어차피 다음에 사야 할 거라면 지금 사도 된다는 말이 되기도 했다. 나는 마트에서 파는 휴지들을 낮은 가격순으로 정렬해 30롤들이 상품 중에 내가 납득한만한 수준의 것으로 한 팩을 골라 카트에 담았다. 그리 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인터넷에서 내가 사 버릇하던 싼 휴지 가격의 두 배 정도는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가격은 무난히 3만 원을 넘겼고, 우유니 계란이니 하는 것들을 몇 가지 더 담고 나니 어럽지 않게 4만 원을 넘겼다.
그렇게 주문한 휴지는 카페 같은 곳에서 종종 보는 크라프트지 색깔의 매우 찰지고 단단하게 감긴 좋은 물건이었다. 그러게, 역시 휴지는 돈 좀 주더라도 쓸만한 걸 사야 한다니까.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휴지를 정리하다가, 나는 문득 지난 4월 그 무렵엔 집에 꽤 많은 휴지가 남아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 휴지들을 다 쓰고 새것을 사야 하는 만큼의 시간이 흘러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때로는 울고 때로는 발광하고 때로는 우울해하고 때로는 슬퍼하면서도 어쨌든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은 월요일이다. 또 한 주일을 살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