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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Sep 02. 2022

아무래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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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새, 열어놓은 창문으로 파고드는 찬바람에 흠칫 놀라 새벽에 잠이 깨고 있다. 저만치 걷어찼던 이불을 더듬더듬 끌어다 둘둘 말고 웅크리며 이야 여름 다 갔네를 중얼거리는 일도 날마다 계속되고 있다. 이제 공식적으로 달력도 9월로 넘어갔으니, 올여름은 이대로 이렇게 퇴거해 버려도 절차상 별 무리는 없지 않을까 싶다.


어제는 침구를 전부 걷어다 털어서 새로 까는 날이었다. 딱 거기까지만 할 예정이었다. 여름이 다 끝났다고는 해도 아직은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며칠만 더 눈치를 볼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이불과 시트 토퍼까지를 걷어내고 베개와 쿠션들을 들어내다가, 나는 여느 때처럼 충동적으로 결심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 침구 그냥 오늘 바꿔야겠다.


이불장 안에는 그와 내가 몇 년에 걸쳐 한두 개씩 사 모아 온 쿠션 커버들과 베갯잇들이 들어 있다. 그것들을 몽땅 꺼내 매트리스가 훤히 드러난 침대 위에 늘어놓고, 한 두어 달 간 뭘 꺼야 할지를 고민했다. 이제 여름은 갔으니 인견 재질의 얇고 까슬까슬한 녀석들은 전부 탈락. 그렇다고 너무 두껍거나 뻣뻣하거나 노골적인 크리스마스트리 무늬 등이 있는 '연말용'도 탈락. 그렇게 이것저것 빼고 나니 딱 찬바람 나기 시작하는 무렵에 쓸만한, 짙은 그레이톤의 커버 몇 개가 남았다. 그것들을 늘어놓고 이건 여기에, 저건 저기에 하는 식으로 어디에 둘 건지를 정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 비해 꼼꼼하지 못한 성격이었고, 손바닥만 한 침실 안에 무슨 쿠션이 어디에 몇 개나 있는가에 대한 셈도 아직 능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미처 보지 못한 쿠션들이 하나씩 추가로 튀어나왔고, 그때마다 나는 투덜거리며 싸 넣어 놓았던 쿠션 커버들을 다시 꺼내 새 커버를 꺼냈다. 이 짓을 네 번을 반복했다. 마지막쯤엔 버럭 짜증이 나서 인간이 이렇게 뒷손이 없어서 어떡할 거냐며, 마치 남이라도 타박하듯 정색하고 짜증을 냈다. 그가 봤더라면 웃었을 것이다. 너를 평생 견디고 산 나도 너한테 그렇게 큰 소리를 낸 적이 없는데 너는 너한테 왜 그러냐고.


그렇게 집안의 모든 쿠션들의 커버를 바꾸고, 베갯잇을 바꾸고, 시트까지를 바꾸고 나니 한 시간 반이 후딱 지나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 놓고, 그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이불만은 바꾸지 못했다. 아직도 한낮엔 30도 가까이 올라간다는 핸드폰의 일기예보 어플을 봤던 기억이 남은 탓이기도 했고, 잠잘 때 조금 추운 건 견뎌도 더운 건 못 견디는 내 성격 탓이기도 했다. 일주일만 더 놔둬 보자. 이불이야 쿠션같이 벗기고 갈아 끼우고 할 것도 없고 그냥 갖다 빨아서 넣어버리고 다른 걸 꺼내기만 하면 되니까 바꾸기로 마음먹으면 그날 당장이라도 바꿀 수 있으니까. 그런 구질구질한 핑계를 대고 나는 기껏 '가을색'으로 바꿔놓은 침대 위에 여름이불을 그대로 깔아 두었다. 그가 봤더라면 그것조차 참으로 너답다며 웃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제는 언젠가 썼던 대로, 집안을 너저분하게 흩트려놓고 청소기를 써도 되는 아침 여덟 시까지를 기다릴 공백조차도 없었다. 침대를 정리하고 시계를 보니 여덟 시였고, 그때부터 청소기를 밀고 남은 정리를 다 하고 나니 또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못한 운동을 간단하게 하고 찬물 한 잔을 따라 책상에 앉으니 일과를 시작해야 하는 아홉 시였다.


주말엔 태풍이 오느니 마느니 하는데 그런 것 치고는 창밖의 하늘이 너무 투명하고 청명해 어딘가 멀고 먼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기온은 더 떨어질까. 그때쯤엔 정말로, 어제 예의상 집어넣지 못한 여름 이불은 세탁을 해서 이불장 안으로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나면 창밖에는 단풍이 들겠고, 그 단풍조차도 이제 좀 드는가 싶으면 어느 날 갑자기 다 떨어지고 없겠지. 늘 그래 왔던 것이면서도 유달리 쓸쓸한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그렇게 가을로 흘러가고 있는 모양이다. 나 혼자만의 이 낯선 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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