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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Sep 03. 2022

태풍이 온다는데

-144

내 고향은 부산이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교를 졸업하던 스물네 살의 봄까지 부산에 살았다. 이젠 그곳을 떠나온 시간이 그곳에서 산 시간과 거의 비슷해져 가고 있어서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는 사실 이외의 감흥은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 바다 근처를 지나갈 때면 그 바다 냄새와 바닷바람이 내 정서 어딘가에 스며있는 것을 가끔 느끼곤 한다.


스물네 살에 부산을 떠나 '윗동네'로 올라오고 난 후 신기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겨울에 눈이 온다'는 사실이었다. 부산에는 눈이 오지 않는다. 거의 절대로 눈이 오지 않는다. '거의'라는 말이 붙은 건 십여 년 만에 한 번 정도 눈이 내려 온 도시가 공황에 빠지는 일이 아주 가끔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24년을 살던 나는 겨울이 되자 발이 푹푹 빠질 만큼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처음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물론 오래 가진 못했다. 타향살이를 시작한 그 해 겨울에는 버스와 지하철 요금을 받지 않을 정도의 폭설이 두어 차례 내렸고, 익숙하지도 않은 빙판길을 종종걸음을 치며 걷다가 미끄러져 호된 엉덩방아를 두어 번 찧고 난 후부터는 나 또한 눈을 그다지 좋아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여름에 태풍이 쳐도 별로 위기감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름이 되면 얼추 대여섯 개쯤의 태풍이 우리나라를 지나가고, 그 태풍이 어디를 어떻게 지나가든 부산은 거의 항상 그 영향권에 든다. 태풍의 영향권에 든다는 건 엄청난 바람과 엄청난 비와 가끔은 엄청난 피해를 맞닥뜨린다는 뜻이다. 요즘 날씨가 기승스러워져서 더럭 겁이 날 정도의 폭우가 가끔 내리지만 태풍이 몰고 오는 비에는 그 국지성 폭우와는 또 다른 무시무시함이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추석 무렵에 지나갔던 태풍 매미다. 추석을 맞아 부산에 내려갔다가 버스 터미널로 가는 길에 본 것은 강풍에 이파리가 죄다 떨어져 앙상해진 길가의 가로수들이었고 떨어진 새파란 나뭇잎들로 가득하던 길바닥이었다. 그 태풍이 아무리 약하든, 규모가 작든, 부산에 사는 이상 태풍이 온다는 말은 또 한 며칠 엄청난 비와 바람에 시달려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윗동네'로 올라오니 태풍은 어느새 한 발짝 떨어진 남의 집 일이 되어 있었다. 물론 여기에도 태풍이 지나간다고 하면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그러나 부산에 살 때 느끼던 만큼은 아니다. 바람은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고, 그 드세던 빗발도 요즘은 장마철에 가끔 오는 폭우보다 기세가 못한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곳에 온 후 태풍 때문에 경각심을 가져 본 건 몇 년 전에 바람이 유독 세다던 볼라벤이 지나갈 무렵 유리창이 깨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테이프를 붙이느냐 신문지를 붙이느냐 정도를 가지고 그와 함께 잠깐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던 기억 정도 외에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더위도 다 지나간 이 시기에 눈치 없이 발생한 가을 태풍 하나가 다음 주 초쯤 우리나라를 스쳐 지나갈 거라는 뉴스가 포털 사이트 메인에 며칠째 떠 있다.


날씨는 며칠째 선선하고 하늘은 쨍하니 맑다. 이대로 순순히 가을로 흘러가면 딱 맞을 그런 날씨인데, 이런 날씨에 무슨 태풍이냐 하고 생각한다. 태풍도 여사 태풍도 아니고 아주 크고 강한 태풍이라니. 이 여름 곱게는 끝낼 수 없다는 심보인가. 오늘 아침 시치미를 뚝 뗀 채 말갛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태풍이 부는 날이면 집에 달아놓은 위성방송에 신호미약이 뜨는 일이 잦았다. 온갖 것을 다 하는 세상에 이런 것 하나도 개선을 못하느냐고 투덜거리며 어쩔 수 없이 보던 지난 방송 vod를, 나는 태풍도 불지 않는 지난 다섯 달 내내 보고 있다. 덕분에, 이번 태풍이 불 때도 문 닫고 블라인드를 친 채 집 안에만 가만히 있으면 밖에선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도 모르고 지나가겠지. 하긴 요즘의 내 삶 자체가 좀 그렇기도 하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 앞에 내던져진 무력한 이재민처럼. 그냥 숨을 죽이고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점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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