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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Sep 09. 2022

여왕과 전세살이

-150

새로 꺼낸 이불 덕분인지 몰라도 오늘 아침엔 30분이나 늦잠을 잤다. 새벽 다섯 시 무렵 추워서 깨지 않은 효과인 모양이다. 참 나라는 인간은 어쩜 이렇게 알기 쉽고 투명한지, 내심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웃었다.


해야 할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글이라도 한 꼭지 쓰려고 자리에 앉아 뜻 없이 포털의 메인 뉴스들을 훑어보다가 아, 하고 잠깐 스크롤을 멈추었다. 영국 여왕의 서거 뉴스가 여기저기 실려 있었다. 향년 96세라던가. 나는 그 나라의 국민이 아니지만 일단 그분은 내가 태어나던 때부터 4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쭉 영국의 여왕이었고 그래서 그분의 나이가 몇 살이든 그분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었다. 저러다가 아들보다 오래 사는 것 아니냐는 고약한 농담도 더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분이 세상을 떠났구나. 어쩐지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구나 하는 비장하기까지 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잠시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떠나고 난 후 부쩍 유명한 분들의 부고가 잦아졌다. 아니, 어쩌면 그 전에도 그 후로도 계속 사람들은 떠나고 있지만 단지 내가 그 소식에 민감해진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글을 쓰던 문필가도, 유명한 여배우도, 옆 나라의 총리도, 수십 년간 프로그램 하나를 진행하던 원로 코미디언도 다 그가 떠난 이후에 떠났다. 그분들의 부고를 들으며 나는 저렇게나 대단하고 유명한 사람들도 결국은 이런 식으로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전혀 유명하지 않았던, 그냥 내 곁에서 30년이 채 못 되는 시간을 살다가 나에게조차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떠난 그를 생각한다. 그렇게 대단하고 유명하고 더러는 이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분들이나 그냥 나 하나만의 사람이었던 그나 결국 삶과 죽음 앞에서는 똑같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면 왠지 조금은 겸허해지는 느낌까지도 든다.


선생님 그냥 우리는 전세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 같아요. 이번 주에 상담을 하러 가서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리는 이 집에 천년만년 살 줄로 생각하고 나 살기 편하게 집을 뜯어고치고 애 학원은 어디를 보내면 될지를 고민하고 차는 어디에 대면 들락날락하기에 편할지를 고민하잖아요. 그런데 그거 아니잖아요. 2년 후에 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무조건 나가야 되는 거잖아요. 그냥 우리 사는 게 다 그런 것 같아요.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주제에, 내일, 아니 당장 오늘 저녁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주제에 너무 많은 고민을 하고 너무 많은 것을 재고 따지면서 사는 것 같아요. 천년만년 살아서 그 자리를 지킬 것만 같았던 분의 서거 소식 앞에, 나는 문득 그 말을 떠올려 본다. 내가 한 말치고는 너무 거창한 말인 것 같다는 약간의 머쓱함과 함께.


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인생에서 왕 혹은 여왕일 것이다. 그러나 꼭 그만큼이나, 언제 어떻게 집을 빼줘야 할지 모르는 전세살이의 팔자이기도 할 것이다.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한가운데 어딘가에 매어진 얇은 실 한 가닥 위에서 조심스레 균형을 잡고 한 발 한 발 걸아가는 그게 인생이 아닐까. 원래 쓰려고 했던 글을 죄다 잊어버리고 이런 글을 쓰게 된 이 때아닌 센치함은 이제 완연한 가을 날씨와 폭신한 이불 덕분에 30분이나 늦잠을 자고 일어난 후유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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