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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Sep 12. 2022

이러고 있다

-153

요즘 들어 하루에 한 끼를 먹다 보니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그 한 끼를 충분하게 먹지 못하면 저녁쯤에 견디기 힘든 공복감에 시달리게 된다는 점이었다. 일주일 단위로, 이틀씩 식단을 짜다 보면 하루 밥이 없는 날이 생기는데 이 날이 가장 위험하다. 이런 날 내가 먹는 메뉴는 주로 메밀국수나 비빔면, 파스타 같은 것들인데 이런 날마다 나는 한국인의 위장에 밥이 한 숟갈이라도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는 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곤 한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어제의 내 점심 메뉴는 메밀국수였다. 메밀국수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로 그가 있을 때도 자주 해 먹었다. 그는 나에게 우동이나 메밀국수 등을 해먹이기 위해서 집에서 쯔유를 끓였다. 파와 양파를 일일이 석쇠에 굽고, 다시마와 가쓰오부시 같은 것들을 넣어서 몇 시간이나 끓여서 식힌 후에 거른 쯔유를 가지고 만든 메밀국수는 어지간한 식당에서 사 먹는 것보다 맛있었다. 그리고 그런 메밀국수를 먹는 날이면 이것만 가지고는 배가 고프다며 주먹밥 같은 것을 사이드로 따로 만들곤 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호사는 끝이었고, 나는 인스턴트로 나오는 메밀국수 하나를 가지고 점심을 때워야 할 참이었다. 이것만 먹고는 분명히 저녁쯤에 출출함을 이기지 못하고 편의점으로 달려가게 될 테니 뭐라도 하나 같이 먹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김밥이나 좀 사다 먹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배달 앱을 뒤져보니 연휴가 채 끝나지 않았는데도 대부분의 가게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 계란말이 김밥을 하는 가게 하나가 확 눈에 띄었다. 이거 한 줄 사다가 같이 먹으면 되겠네. 나는 배달앱으로 포장 주문을 넣어놓고, 집에서 도보로 10분쯤 걸리는 김밥집으로 나섰다.


단출하게 포장된 김밥 1인분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작년엔, 그 작년엔, 이젠 기억도 채 나지 않는 그 많은 추석들에 나는 어떻게 지냈던지. 그가 해 놓은 전들과 튀김들을 주섬주섬 주워 먹고 텔레비전에서 해 주는 특선 영화를 골라 보면서,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재미있고 푸짐하게 보냈으면서 그게 그런 건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갔던 그날들을. 그리고 라면과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올해의 추석을. 아마도 내년도, 내후년도 비슷하겠지. 쓴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애면글면, 온갖 짓을 다 해가며 키워 놨더니 올해 추석엔 추석 당일에는 라면 끓여먹고 추석 다음 날은 분식집에서 김밥 사다 먹고. 오빠 내가 이러고 살고 있다. 인적이 뜸한 거리를 걸어가며 나는 그렇게, 마치 누구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뭐, 어쩌라고. 이러는 꼴이 보기 싫었으면 그렇게 훌쩍 도망가지 말았어야지. 조금 더 사람 구실을 할 때까지라도 내 옆에 있었어야지. 오빠 없어지면 가뜩이나 귀찮은 거 싫어하고 뒷손 없는 내가 이러고 살 줄 몰랐냐고. 다 알면서 그러고 도망간 거 아니냐고. 미워서. 괘씸해서. 너 어디 한 번 식겁 좀 해 보라고 내뺀 거 아니냐고.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라고. 서운한 게 있었으면, 불만이 있었으면 말로 해야지 이렇게 대놓고 스트라이크부터 때리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냐고. 내가 오빠를 그렇게 키웠냐고. 뭐 그런 말들을.


그래도 다행이다. 오늘은 며칠 전 충동적으로 마트에서 집어온 한우를 가지고 끓여놓은 소고기 뭇국이 있어서 그걸 먹을 예정이라서. 그저께 먹은 송면이 아직 반 정도는 남아 있어서. 그래도 라면이나 계란말이 김밥보다는 명절다운 메뉴로 연휴를 마무리할 수 있어서. 이거라도 없었으면 멀리서 지켜보는 그의 마음이 아주 조금은 아팠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혼자 남은 나를 보는 마음은, 조금은 고소할지는 몰라도 마냥 후련하고 유쾌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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