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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Sep 14. 2022

솎아내기

-155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몸에 밴 습관(창문을 연다든가 물을 마신다든가 하는)이 아니라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은 꽃대를 자르는 것이다.


처음엔 꽃병의 물만을 갈고, 꽃대의 끝을 조금씩 자르는 정도까지만 했다.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그 알량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정도로는 안된다는 걸 알게 된 건 꽃집 사장님을 통해서였다. 시들거나 상처 난 꽃들은 그때그때 잘라내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걔네들 따문에 멀쩡하던 다른 애들도 시들거든요. 꽃 말고 이파리들도 너무 많이 놔두시면 걔네가 꽃으로 갈 물을 다 빨아먹어버려서 꽃이 빨리 시들어요. 보기 좋을 만큼만 남겨두시고 따주시는 게 좋아요.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깟 것쯤 못할 게 뭐 있겠나 싶었다.


그러나 직접 맞닥뜨린 꽃을 솎아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문제는 도대체 어느 정도로 시든 꽃을 잘라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꽃이 시드는 것에 명확한 수치적인 단계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고, 전적으로 내 눈과 머리로 직접 판단해야만 한다. 아 얘는 틀렸네 싶을 정도로 급작스레 시드는 꽃은 의외로 많지 않다. 대부분의 꽃들은 아주 조금씩, 그래서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만큼 아주 천천히 시든다. 꽃이 활짝 벌어지고, 꽃잎이 끄트머리부터 조금씩 말려들어가고, 목에 힘이 없어져 조금씩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모든 단계들은 아주 조금씩,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단칼에 오늘 '처분할' 꽃을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이유는 별 게 아니고, 그냥 그 꽃들이 너무 예쁘기 때문이다. 조금 시든 기미가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단칼에 잘라서 쓰레기통에 버리기에는 차마 안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하는 기분으로 끝만 잘라 다시 꽃병에 꽂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아침을 넘긴 꽃들은 대개 그날 하루를 채 버티지 못하고 저녁 무렵이 되면 보기 딱할 만큼 시들어 있다. 그의 책상에 꽃을 사다 놓은 것이 벌써 스무 번째이니 나는 모르긴 해도 스무 종류 정도의 꽃을 그런 식으로 지켜본 셈인데, 번번이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나는 아직도 단번에 시든 꽃을 가려내 잘라버리지 못한다.


4, 5일 정도는 갈 거라던 용담은 일주일을 넘겨 거의 열흘 가까이 되도록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다. 용담의 경우는 꽃이 시들기 시작하면 외려 꽃잎을 움츠리고 꽃잎의 끝이 갈색으로 마르면서 내 수명은 이제 끝났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래서 나는 다른 꽃들의 경우보다는 비교적 간단하게 솎아내야 할 꽃을 가려낼 수 있었다. 나는 처음 사 올 때의 절반 정도 남은 용담을 내 책상 위로 옮겨 놓고 어제 그를 만나러 봉안당에 다녀오던 길에 꽃집에 들러 새 꽃을 샀다. 핑크색과 흰색 꽃이 섞여서 피는 공작초였다. 공작초는 용담에 비해 곁잎도 많고 잔가지도 많고 사장님께서 단골이라고 인심 좋게 한 움큼을 더 주셔서 매일 아침 솎아내야 할 것들이 더 많을 예정이다. 실제로 오늘 아침만 해도 남아있는 용담을 손질하는 것의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니까.


시들거나 수명이 다한 추억도, 기억도 이런 식으로 솎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꽃병에 꽂아놓는 꽃 하나도 솎아낼 시기를 제대로 못 잡아내는 내가 그런 게 가능하다 한들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어서. 그리고 조금은 냉정해져서 그런 걸 할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가 조금이라도 묻어있는 모든 기억은 다 예외가 될 것이라서. 어차피 그런 거라면 내 인생에서 솎아내기까지 해야 할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을 거라서.


그래서, 다 떠안고 가기로 한다.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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