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도대체 무엇을 해주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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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나는 먹는 것에 그리 큰 애살이 없는 편이었다. 밥이란 그냥 살기 위해 먹는 것 정도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못 먹겠다 싶을 정도의 음식이 아니면 그 속에서 나름의 좋은 점을 찾아가며 꾸역꾸역 먹곤 했다. 반면에 그는 이왕 먹을 거라면 맛있게 해서 먹는 편이 좋지 않냐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백종원이라든가 김수미 같은 유명인들의 레시피를 유심히 봐 두었다가 실제로 만들어보고, 이건 우리가 먹기에는 간이 세고 저건 우리 입맛에는 너무 맵다는 식으로 수정해서 따로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다. 그 덕분에 나는 인터넷에서 핫한 레시피의 음식들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집에서 먹어보는 호사를 누렸다.


그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일을 그만둔 후로 그는 부엌살림을 거의 혼자 다 하다시피 했다. 흙파는 한 단을 사 오면 뿌리를 따로 잘라 보관하고 남는 부분은 시든 이파리 끝 부분만 잘라낸 후 3등분으로 잘라 반 단씩 종이호일에 싸 두었다. 콩나물이나 숙주는 양이 너무 많다 싶으면 밀폐용기에 남은 분량을 옮겨 담고 물을 부어 냉장고에 넣어둔 후 날마다 한 번씩 물을 갈아주었다. 감자나 양파는 한 알 한 알 따로따로 신문지에 싸서 구멍을 뚫은 종이상자에 보관했다. 식단의 경우는 향후 두세 달 치를 미리 짜두고, 그에 맞춰 마트에서 주문을 하곤 했다. 나는 매번 그의 그런 꼼꼼함에 혀를 내둘렀다. 옛날에 내가 하는 거 보면서 속에 천불 꽤나 났었겠다는 말에 그는 말없이 웃었었다. 이런 그였으므로, 냉장고 안에는 그의 계획에 따라 뭔가를 해서 나에게 먹일 식재료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떠나간 후 내가 그에게 한 첫 번째 약속은 당신이 나를 위해 사다 놓은 저것들 중 하나도 썩혀서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하루 날을 잡고 냉장고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한번 주욱 훑어보았다. 그의 식단을 다 지킬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최소한 뭐가 얼마만큼 있는지는 알아야 그걸 먹어치울 수 있을 테니까. 열네 알이나 남은 계란은 계란 장조림을 하고 계란 볶음밥을 해서 여덟 알을 먹어 없앴다. 조금 남아 있던 당근도 다 먹었다. 표고버섯은 며칠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곰팡이가 피어서 그냥 버렸다. 이 와중에 쓸데없는 미련을 부리다가 아파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냉장고를 다 체크하고 밖에 나와 있는 것들을 뒤져 보았다. 어느 소셜커머스에서 싸게 파는 걸 보고 충동적으로 질러놓은 참치캔 묶음과 스팸 묶음이 있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 외에, 도대체 뭘 하려고 그랬던 건지 사골국물이 네 팩이나 나왔다. 부대찌개나 감자탕 같은 걸 만들려고 했을까. 내가 얼마 전에 냉동만두를 여섯 팩이나 사다 놓았으니 만둣국 같은 걸 끓이려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대체 나로서는 어디에 쓰려고 했던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물건이 하나 나왔다. 죽순 통조림이었다. 죽순이라니. 가끔 삼선짬뽕을 시켜먹을 때 한 두 조각 들어있는 걸 본 게 전부인 그 죽순 통조림이 스팸과 참치캔들 사이에 하나 들어있었다. 이걸로 그는 도대체 내게 무슨 맛있는 걸 해주려고 했던 것일까. 여기서 나는 잠시 망연해졌고, 또 울컥 눈물이 나 한참이나 소리를 죽여 흐느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언젠가 나는 생각보다 그럭저럭 잘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잘 먹고, 잘 자고, 즐겁게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곁에서, 그를 믿고 부리던 응석들을 하나도 부리지 못하게 된 요 며칠간 나는 스스로도 느낄 만큼 조금 더 어른스러워졌다. 그러나 내가 언젠가 그렇게 된다고 해서 내가 그를 잊었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물어볼 일이 하나 더 늘었다. 그 죽순 통조림은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산 것이냐고.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고.






PS. 어제 갑자기 브런치 조회수가 늘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일인 가구의 남은 밥 처리 방법 정도의 글을 기대하시고 온 많은 분들께 생각보다 너무 우울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게 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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