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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Sep 21. 2022

엄마, 언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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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란 물론 그지없이 소중한 존재다. 엄마가 있음으로 해서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가정이 있다고 말하면 '엄마'가 아닌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대단히 실례가 되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건 아마도, 집 혹은 가정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온갖 다정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속성들을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는 존재가 엄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와 집의 현관문을 열며 무턱대고 엄마부터 찾았던 것은, 그렇게 돌아온 집에 엄마가 없으면 이유를 알 수 없는 허탈감과 당혹감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그래서가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소중한 '엄마'가 며칠 정도 집을 비우는 이벤트가 생기면 대부분의 가족들은 그 상황을 기뻐한다. 그건 무슨 깊은 생각 끝에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끊임없이 뭔가를 해라 혹은 하지 마라고 잔소리하는 사람이 잠깐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일종의 해방감 같은 것일 테다. 그래서 엄마가 집을 비우는 그 며칠간, 우리는 밤늦게 치킨이나 피자를 시켜 먹고 거실에서 캔맥주를 마시고 밤새워 게임을 하거나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는 등의 그야말로 별 것도 아닌 일탈을 즐기며 즐거워한다. 엄마의 부재를 틈타서.


그러나 그 해방감이 즐거운 건 며칠이 고작이다. 엄마의 부재가 길어지면 우리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물론 냉장고에는 엄마가 잔뜩 만들어놓고 간 밑반찬들이 있고 한동안 질리게 먹을 만큼 끓여놓은 곰탕이나 카레도 있다. 여차하면 라면을 끓여먹거나 배달음식을 먹어도 된다. 어차피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하니 내가 뭔가 애면글면 애를 쓸 필요도 별로 없다. 그러나 이 집에서, 이 집을 지탱하던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불안감이 해방감을 앞서는 날은 며칠 지나지 않아 찾아온다. 그 불안감을 깨닫는 순간, 내 인생은 일종의 비상상태가 된다.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있어야 할 것이 제 자리에 있지 않은 상태.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된다.


그때쯤, 우리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그런 말을 한다. "엄마, 언제 와?"라고. 그리고 그때쯤에야 깨닫게 된다. 엄마의 부재가 단순한 관광이나 여행 같은, 날짜가 정해진 속 편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엄마는 언제 나을지 기약도 없는 병을 앓고 있는 엄마의 엄마를 돌보기 위해 집을 비운 것일 수도 있다.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엄마 또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해서 집을 떠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알지 못하던 가족 내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가버린 것이며,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떠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의 비상상태는 영영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말이 된다.


이번 주 상담을 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이야기를 선생님 앞에서 꺼내놓았다. 이 이야기들은 나 스스로조차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선생님 요즘 제 인생이 딱 저런 느낌이에요. 엄마가 집을 비워서 혼자 집 지키고 있다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언제 오냐고 물어봤는데 '몰라' 혹은 '안 가'라는 대답을 들은 그런 기분요. 뭔가 제 인생에 아주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고 이제 거기에 적응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잘 안 돼요. 그냥 이건 잠시 이러다 마는 상황인 것만 같아요. 오빠는 아주 멀리 출장 같은 걸 갔고, 그냥 저 혼자 집 지키면서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에요.


이런 일을 겪기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앞세운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슬픔 혹은 떠난 사람을 따라가고 싶은 욕구를 견디는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분들도 계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 가장 힘든 것은 그가 사라져 버린 남은 내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8개가 한 세트인 떠먹는 요거트를 사면 예전엔 그걸 다 먹어치우는 데 나흘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이젠 일주일이 넘게 걸린다. 그러나 유통기한이 닷새 정도 남은 것을 샀다가는 몇 개는 날짜를 넘겨서 먹어야 한다는, 그런 계산이 얼른 되지 않는 그런 식이다. 그리고 가끔 그런 계산을 제대로 해내 놓고, 나는 그의 부재를 너무나 쉽게 인정해버린 나 자산의 나약함에 절망하고 상처받고 죄책감을 느낀다. 그의 부재를 인정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 그 어떤 것도 내겐 쉽지 않다.


이번 주 상담의 결론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어쩌면 지극히 원론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그런 결론밖에는 내릴 수가 없는 문제일 것이다. 아니 애초에 결론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하는 건지조차도 지금은 알 수 없다. 며칠 전 태풍이 불던 날 그랬듯, 그냥 숨을 죽이고 웅크린 채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건지도 모른다. 엄마는 집에 없고, 언제나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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