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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채워 넣고 관리하는 것이 전적으로 내 소관이 되면서부터 우리 집 냉장고에서 자취를 감춘 식재료들이 몇 가지 있다. 시원한 국물을 내는 데 쓰는 무가 사라졌고 뭔가를 볶을 때 한 줌씩 넣어 식감을 돋우던 양배추도 사라졌다. 향도 좋고 맛도 좋아서 그가 자주 쓰던 표고버섯도 마트에서 주문한 후 며칠 동안이나 겨우 있을 뿐, 그가 있던 때처럼 떨어뜨리지 않고 사다 놓지는 못하고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직은 감자와 양파 정도가 고작이다. 그 외의 다른 채소 종류들은 반 정도는 결국 버리게 될 것 같아 아예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애매하게 한 발씩을 걸치고 서 있는 것이 대파이다.
그는 요리를 할 때 파를 많이 썼다. 이건 뭐 파만 먹고 사는 거냐며 투덜거리던 것도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작년쯤이었던 것 같은데 대파 값이 깜짝 놀랄 정도로 훌쩍 뛰어서 한 단에 근 5천 원 가까이를 주고 사다 먹어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의 그는 그 문제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아 했었다. 그는 뭔가를 볶을 때는 파를 먼저 볶아서 파기름을 냈고 국물을 끓일 때는 마지막에 넣어서 풍미를 냈다. 가끔 고기를 구워 먹거나 비빔면을 끓여먹을 때면 세로로 결을 따라 길게 채를 썰어서 파무침을 만들거나 숫제 면에 비벼 섞어서 먹기도 했다.
물론 나는 그만큼 음식을 자주, 많이 하지도 않고 파를 그만큼 많이 쓰지도 않는다. 그러나 파는 다른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할 수 없는 식재료들과는 그 위치가 조금 달라서 넣지 않으면 확실히 뭔가 음식의 맛이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마트에서 주문을 할 때가 아니라도 냉장고에 파가 떨어지면 근처 마트에 가서 한 단씩을 사 온다. 사 와서는 그가 하던 대로, 뿌리 부분과 시든 잎 끝부분을 쳐내고 남은 부분을 3등분하고 두 묶음으로 나누어서 종이호일에 감싸서 비닐팩에 포장해 놓는다. 그래 놓고 두 묶음의 파를 번갈아가며 꺼내 쓰고 꺼내 쓸 때마다 새 종이호일과 새 비닐팩에 다시 포장한다. 파를 사 오자마자 채를 썰어서 냉동실에 넣어두면 물론 오래가긴 하지만 그렇게 얼린 파들은 녹는 순간 급격히 흐물흐물해지고 파 특유의 향이 전부 날아가버려 그는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이 종이호일을 쓰는 방법은 그가 이것저것을 시도해 본 결과 대파를 그나마 가장 오래 신선하게 보관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가장 중요한 전제가 있다. 이 방법은 날마다 파를 쓰고 날마다 호일과 비닐을 바꾸어야만 효과가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그와는 다르게 나는 매일 파를 꺼내지 않는다. 그래서 간만에 쓸 일이 있어 꺼내 보는 파는 언제나 배어 나온 물기에 축축해져 있다. 파를 쓰는 양도 그가 쓰던 것만큼 많이 쓰지 않는다. 그 한 줌은 되나 싶은 파 한 단을 붙잡고 근 한 달 남짓을, 나는 그런 식으로 씨름하게 된다. 그래서 그가 하던 방식대로 파를 보관해봤자 끝무렵에는 언제나 물기에 물러져 물컹거리는 파가 남는다.
지금 냉장고에 남아있는 파는 추석 되기 직전에 산 것이다. 이 파를 사들고 꽃집에 가서 대목이라 물가가 비싸니 어쩌니 하는 잡담을 사장님과 나누었던 기억이 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그 한 달 남짓한 시간을 지나면서, 파는 또 역시나 물기가 배어 나와 엉망으로 물러져 흐늘거리고 있었다. 어제 간만에 파를 좀 쓰려고 꺼냈다가, 나는 혀를 차며 남아있는 파의 대 부분을 베어내서 버렸다. 그래도 좀 온전하다 싶은 것들만 남겨서 키친타월로 물기를 닦고 다시 종이호일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물론 그런 짓을 해 봐야 오래 가진 못한다. 아마 그렇게나 정리해놓은 파들은, 다음번 파를 쓰려고 꺼낼 때쯤엔 다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또 냉큼 다 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운 마음에 건질 수 있는 부분만 억지로 억지로 건져서 그렇게 정리를 해서 넣어둔다.
2천 원 남짓하는 파 한 단을 사서, 그 한 단을 채 다 먹지 못해서 4분의 1 정도는 바리는 나날. 어쩌면 요즘의 내 삶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매일매일 나를 돌보며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