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5월 7일은 그와 내가 27년 전 처음 만난 날이었다. 물론 우리가 서로에게 친한 오빠 동생이 아닌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날은 그보다 한참 더 지나서였지만, 그래서 언제부턴가 우리의 기념일 리스트에서 슬그머니 뒤로 밀리긴 했지만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라는 핑계를 대고 49제도 되기 전 봉안당에 그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그날 봉안당에 갖다 놓을 만한 물건을 찾아보다가 과테말라 걱정인형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그냥 어떤 보험사의 광고에나 나오는 걸로 알았던 그 인형은 생각보다 유래가 길었다. 이왕 사는 김에 내 것까지 두 세트를 샀다. 하나는 그의 봉안당에 갖다 놓고, 남아있는 사람들 걱정 따윈 하지 말고 편히 쉬라는 말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혼자 꾸역꾸역 살아가던 지난 일요일이었다. 언제나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정리하고 잠깐 책상 앞에 앉아있는데 울컥 속에서 뭔가가 치밀었다. 그건 울음도 아니고 서운함이나 원망도 아니었다. 그냥 아주 순도 높은 그리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헤야 할지 몰라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다가, 나는 그의 봉안당에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봉안당에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가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발인하는 날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고, 삼우제 날은 봉안당에 갖다 놓을 물건을 주렁주렁 들고 나선 길에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그냥 택시를 탔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포털을 뒤져 버스 노선을 한 번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한 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집안에 있을 때는 조금 서늘한 듯이 느껴지던 날씨는 정작 밖으로 나와 보니 후끈했다.
버스에서 내려 봉안당까지는 제법 경사가 있는 비탈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했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봉안당 근처로는 경황이 없어 미쳐 보지 못했던 숲이 울창했고 군데군데 아직 수명이 남은 봄꽃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예전의 내 꿈은 지금 현생에 걸려 있는 복잡한 일들을 다 정리하고 꼭 이렇게 꽃이 많이 피는 곳에 조그만 집을 짓고 그와 함께 사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당신은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기어이 이렇게 혼자 여기 왔구나. 그런 생각에 잠시 발을 멈추었다.
봉안당에 가져온 걱정인형을 안치하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며칠간 잘 쉬었는지, 이제 아픈 데는 없는지, 내가 없어서 심심하진 않았는지 그런 것들을. 나는 당신이 너무너무 그립고 보고 싶지만, 살아있는 나야 뭐 어떻게든 될 테니 거기서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라는 말을 하면서 나는 또 한참을 울었다.
5월 7일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봉안을 나와, 아까 한참을 올라온 비탈길을 다시 걸어 내려갔다. 쨍쨍하니 맑은 하늘과 후덥지근한 공기에 어울리지 않은 서늘한 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와 후끈하게 맺힌 땀을 달래주었다. 나 비탈길 올라갈 때 고생했다고 이런 세레모니 해 주는 거야? 웃자고 해 본 말이었다. 그런데 말 끝에 다시 눈물이 터졌다. 이런 거 필요 없는데. 이런 거 안 해 줘도 되는데. 이런 거 하지 말고 그러지 말지. 그런 거 하지 말고 그렇게 가지 말지. 그런 말들을 끝도 없이 되뇌며, 나는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비탈길을 내려와 버스 정류장까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