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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난 후 음악을 거의 듣지 않고 지내고 있다. 날마다 충전하던 게 일이었던 블루투스 이어폰은 거의 한 달 가까이 책상 위에 그냥 방치되어 있다. 일부러 음악을 멀리하고 있다거나 한 건 아니다. 다만 음악을 들을 마음이 생기지 않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소위 세상의 모든 이별 노래들이 다 내 이야기인 것처럼 들리는 그런 상태인지라 들어서 가슴이 아플 가사는 알아서 피하려는 자기 방어기제 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가끔 머릿속에서 불쑥 떠오르는 노래들이 있다. 물론 대부분이 이별 노래들이다. 요즘은 죄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슬픈 노래들만 고장 난 LP 플레이어처럼 머릿속을 맴돈다. 혼자 먹을 밥을 차리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뜻 없이 흥얼흥얼 입 밖으로 밀려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내 입으로 뱉어낸 노래 가사를 곱씹다가 울컥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그의 책상에 꽂아놓은 프리지아가 시들어 다른 꽃을 사려고 마트에 가던 길이었다. 길고 복잡한 제목에, 후렴구 한 마디 정도나 아는 요즘 이별 노래가 하나 있어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마트에서 꽃을 고르면서 그 노래를 들었다. 마트에서 틀어놓은 것이었다. 그 노래는 요즘 히트하는 노래도 아니었고 3년쯤 전에 나온 노래였다. 그 우연 아닌 우연에 나는 그냥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불쑥 슬픔이 치밀어 그의 봉안당에 다녀오던 길, 그 비탈길을 올라가며 흥얼거리던 오래된 발라드가 하나 있었다. 세월이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 그대 내 곁에 있어요. 떠나가지 말아요. 나는 아직 그댈 사랑해요.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와 적막을 견디기 위해 틀어놓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출연자가 그 노래를 불렀다. 20여 년 이상을 함께 살아 서로가 서로의 사고방식을 많이 닮아버린 우리였다. 그와 나는 비슷한 타이밍에 비슷한 것을 생각했고, 그래서 가끔 물으나마나 한 것을 묻고 들으나마나 한 대답을 들어놓고 하여간 둘이 합쳐 일 인분이라며 웃던 나날이 있었다. 이것도 그런 것이라고나 해야 할까.
버스를 타고 좀 멀리 갈 일이 있었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낯선 길이어서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버스 노선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버스는 그와 함께 보던 한 드라마 세트장 바로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볼 일을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에 그 정류장에 내렸다. 그가 아직 내 곁에 있었다면 아마 분명히 한 번은 보러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본 드라마의 촬영지나 세트장을 찾아다니는 것은 그와 나의 소소한 즐거움이기도 했으므로.
코로나 때문에 오래 문을 닫았다가 재오픈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그 세트장은 조용했다. 나는 세트장 곳곳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세트장 여기저기 마련돼 있는 포토존을 볼 때마다 이런 데 올 때마다 자기 사진은 찍지 않고 내 사진만 찍어주던 그의 생각이 났다. 비어 있는 포토존을 하나하나 다 사진으로 찍었다. 이젠 내가 당신을 많이 찍어줄게. 그런 생각이었다.
사진을 찍으며 세트장 이곳저곳을 구경하는데 세트장에서 틀어놓은 노래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익숙한데 노래는 처음 듣는 노래였다. 내 방엔 온통 추억 투성이. 그 가사 한 구절이 마음을 찔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가사 한 구절을 가지고 검색을 했다. '첫 이별 그날 밤'이라는 노래였다. 나온 지가 10년도 지난 오래된 노래였다. 3단 고음으로 유명한 그 노래만 알았었는데 같은 앨범에 이런 곡도 있었구나. 집으로 오는 내내 나는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그 노래의 가사를 읽고 또 읽었다.
수고했어 사랑 고생했지 나의 사랑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그가 세트장 스피커를 빌려 내게 들려준 노래라고. 우리는 언제나 비슷한 타이밍에 비슷한 것을 생각하던 사람들이었기에. 저 가사는 내가 고생만 하다 떠난 그에게 하고픈 말이기도 하고 그가 자신 없는 세상에 혼자 남은 내게 하고픈 말이기도 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