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늦잠

-1

by 문득

그날따라 그는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기운이 없었고, 내내 졸았고, 축 처져 있었다. 결국 그러다 못 이기고 열 시 반쯤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으니 좀 일찍 눕자고 했다.


우리 사이에 통하는 말로 눕자는 말은 거기서 금방 잔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냥 그때부터 텔레비전 타임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워 간식거리를 주워 먹으며 ott로 풀린 영화를 보거나 밀린 드라마들을 챙겨봤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날도 으레 그런 하루였다.


그날의 간식은 도넛과 오렌지주스였다. 새로 나온 신상 도넛이라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맛이 있느니 없느니 따위를 품평하면서, 모 방송국에서 방송되는 패널 셋이 나와 친구와 이야기하는 포맷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지켜봤다. 그날의 주제는 1999년 인현동 화재 참사였다.


그렇게 텔레비전을 보고 도넛을 다 먹은 후, 우리는 잠이 들었다.


중간에 한 번, 목이 말라 깼다. 물 보충을 깜박한 가습기가 꺼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럴 때 물을 꼭 보충해서 다시 켜놓고 자곤 했지만 나는 그런 뒷손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귀찮았다. 그래서 일어나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털썩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때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한 번 들여다봤어야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늘 일어나던 대로 아홉 시쯤 일어났다. 그날은 급한 등기를 보낼 곳이 있었다. 원래라면 어제 다 출력해서 봉투에 포장해놓고 오늘 우체국에 들고만 가면 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집에 복사용지가 떨어진 것을 밤 9시도 넘어서야 알았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사 오려는 것을, 그는 뭐하러 지금 굳이 나가냐며 내일 사 오라고 말렸다.


그래서 나는 침대에서 일어서자마자 대충 옷을 주워 입고 집 앞 문구점에 가서 복사용지 한 묶음을 사 왔다. 최소한 이때 집을 나서기 전에, 이불이라도 한 번 들쳐봤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태평했었는지. 나는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싱크대 세제 수전이 망가져서 새로 달아야 할 것 같은데 타공 치수가 얼마인지를 물었고 오늘 등기를 보낼 곳에 전화를 해서 보내야 하는 서류의 부수가 몇 부인지를 물었다, 그런 태평하기 그지없는 전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프린터기에 사 온 종이를 물리고 서류를 출력해 스테이플러로 철하고 도장이 필요한 곳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는 와중에 자주 가는 인터넷 커뮤티니에 들러 몇몇 글들을 읽으며 낄낄댔다. 그러느라 시간은 오전 11시가 되었다.


그는 요새 밤에 잠을 잘 못 이루고 새벽에나 늦게 잠이 들어 늦잠을 자곤 했다. 그날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11시까지나 자는 일은 드물었다. 금요일은 일주일 동안 흐트러진 침대의 이불을 다 걷어내고 새로 까는 작업을 하는 날이고, 일주일에 한 번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날이었다. 오빠, 너무 안 일어나네. 몸을 잡아 흔들었다. 그런데 잡히는 팔이 나무토막 같았다. 오빠. 오빠. 두어 번 부르며 몸을 흔들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옆으로 돌아누운 귀며 뺨 언저리가, 얼핏 보이는 입술의 색깔이 이상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건 그때였다. 배게며 시트가 흘러나온 침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걸 확인하고, 나는 발작하듯 119에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는 그 늦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내 침대에서 늦잠을 자는 그의 모습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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