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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Oct 22. 2022

좀 더 나아져야지, 두 번째라면

-192

'비단향꽃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안 것은 반년쯤 전의 일이다. 아주 예전에 그런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던 것 정도는 알고 있는데, 그때는 그게 꽃 이름일 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어디서 어감 좋고 예쁜 말들만 죄다 갖다 모아 붙인 무슨 신조어 같은 것인 줄로만 알았고 그 잘못된 인식을 굳이 바로잡을 기회도 필요도 없는 채로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4월이 중순을 넘어 지나가던 어느 날, 나는 그의 책상에 꽂아두었던 프리자아가 시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다른 꽃을 사러 마트에 갔다가 연분홍색 꽃잎이 조랑조랑 매달린 낯선 꽃 한 단을 사 왔다. 이 꽃은 뭐라고 하는 꽃일까. 핸드폰의 이미지 검색을 통해 알아낸 그 꽃의 이름이야말로 비단향꽃무, 영어로는 스토크라고 하는 꽃이었다. 아아. 그게 이런 꽃이었구나. 그를 떠나보내고 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과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던 내 마음속에도, 아주 잠깐이나마 그런 놀라움의 순간이 스쳐갔다.


'향이 좋은 꽃'은 의외로 그리 흔하지 않다. 그 아름다운 자태와 더불어 꽃의 본질로까지 생각되는 향기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엔 매우 엷고 미미해 그 앞에 코를 들이대고 맡지 않으면 잘 느낄 수가 없다. 적어도 내가 지금껏 사다 그의 책상에 꽂아두었던 스물여섯 종류의 꽃들은 그랬다. 그러나 그중에 가끔, 외출했다 돌아오면 마치 수고했다는 인사라도 건네듯 방 안 가득 향기로 채워놓는 몇 안 되는 꽃들이 있다. 비단향꽃무가 그런 종류의 꽃이다. 어감 좋고 예쁜 말들만 갖다 붙인 것 같은 그 이름 중에 왜 굳이 '향'자가 들어갔는지 저절로 남득이 가게 만드는 꽃이라고나 할까.


4월에 사다 놓았던 연분홍색 비단향꽃무는 며칠 가지 못했다. 당시의 나는 꽃을 꽂아놓는 기본적인 요령조차 모르던 '꽃알못'이었고, 꽃병에 70%쯤 듬뿍 물을 채운 꽃병에 꽃을 담가놓듯이 꽂아놓았으니까. 그런 환경에 노출된 비단향꽃무는 며칠도 가지 않아 그 튼튼한 줄기가 속부터 흐물거리기 시작하더니 한 닷새쯤이 지나자 급속도로 시들기 시작했다. 꽃이 예뻤던 만큼, 그 향이 좋았던 만큼 빨리 시들어버린 그 수명에 대한 아쉬움은 오래 남았었다.


그리고 이번 주의 꽃을 사러 꽃집에 갔다가, 나는 마치 금방 튀긴 팝콘처럼 몽글몽글하게 부풀어 오른 하얀 비단향꽃무를 발견하고는 한 단을 사 왔다.


향은 참 반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좋다. 그리고 꽃을 간수하는 내 재주가 조금은 나아진 탓인지 먼저 시든 두세 송이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꽃들은 아직도 꽤 멀쩡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버텨주고 있다. 봉오리였던 것들 중 몇몇 송이는 그 사이 꽃망울을 새로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 걸 보면서, 나는 그래도 반년 전의 나보다는 내가 조금 나아졌구나 하는 사실을 느낀다. 그래도 명색 두 번째 사 오는 꽃이라 그런지.


그에게 내가 한 그 수많은 잘못들을 지금 다시 만난다면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그에게 좀 더 다정하고 살가웠을 텐데. 오늘 아침에 꽃병에 물을 갈고 비단향꽃무들의 줄기를 잘라 다시 꽂아놓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꽃이 아니고, 그래서 이젠 다시 만날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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