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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Nov 15. 2022

바쁘니? 2

-216

어제 점심때쯤, 예의 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잠자코 그분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그럴 만했다'는 거였다.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놓기는 힘들지만 지인과 남편분은 부부 사이니까 가능하지만 반면에 부부 사이니까 하면 안 되는 말들을 서로 쏟아내며 매우 감정적으로 심하게 다투신 것 같았다. '이 사람하고 그만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까지도 하셨던 모양이다. 그저께 밤에 전화기 너머로나마 귀먹은 화를 냈던 것이 머쓱해져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 네가 이런 문제에 무슨 할 말이 있겠니. 제가 참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다는 나의 조심스러운 대꾸에 지인께서는 그렇게 대답하셨다. 이런 말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가끔 네가 참 부럽다. 너는 그래도 네 평생을 불살라서 사랑한 사람이 있었잖아. 자식에 매이고 돈에 매이고 정에 매여서 산 것 말고, 그냥 네 마음이 끌려서 평생을 좋아한 사람이 있었잖아. 그거 아무나 그렇게 되는 거 아니다? 그 말씀은, 정말 알고 한 말씀은 아니겠지만 그저께 밤에 내가 했던 못된 생각에 대한 대답인 듯이도 느껴져서 나는 네 그렇죠 하는 흔해빠진 맞장구조차도 치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렇게 지인과의 15분 남짓한 통화를 끝내고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방금 한 통화의 내용을 곱씹어 보았다.


사랑의 끝이 반드시 결혼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결혼의 시작에 반드시 사랑만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꽃병에 꽂아놓는 모든 꽃이 다 피어서, 만개한 후에 시들지는 않는다. 가끔은 봉오리인 채로 제 수명을 다하고,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한 번 보여주지도 않은 채 봉오리를 꼭 닫은 채 목이 꺾여 시드는 꽃도 더러 있다. 생각건대 그와 나의 관계는 그런 쪽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져야만 펼쳐지게 되는 '다음 스테이지'라는 것은 분명히 있게 마련이고, 그와 나는 그 '다음 스테이지'에 진입하는 것을 거부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는 것을 택했다. 그래서 가끔 그는 나에게는 남편이라기보다는 색이 조금 짙어진 오래된 연인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이 느껴질 때가 있다. 지인의 말씀은 아마도 그런 의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게 부러워할 만큼 좋은 일인지, 솔직히 잘은 모르겠다. 뒤집어서 말하면, 살 맞대고 오래 산 부부에게는 그와 나의 관계 같은 불안정한 관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단단함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어제 지인과의 통화에서도 그랬다. 헉 소리가 나올 만큼 아픈 말을 듣고, 상대에게 똑같이 쓰라린 말들을 던지고, 그런 엄청난 말들을 주고받아놓고도 '이제 와서 어쩌겠어' 하고 하하 웃으며 털어버릴 수 있는 그 견고함은 내가 영원히 가지지 못했고 이젠 혹시나 가져볼 기약조차 사라져 버린 그 어떤 것일 테니까. 그러나 나는 차마 그런 말까지는 지인에게 하지 못했다. 그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마 그런 것이 아닐 거라서.


다만 그런 생각을 한다. 평생을 불살라서 사랑한 사람. 남들이 보기에도, 그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그런 거라면 나는 그렇게 헛살기만 한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아무나 그럴 수는 없는 거라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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