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바닥 밑에 지하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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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냉장고 파먹기'라는 말이 있다. 집에 먹을 것이 떨어져 갈 때 냉장고 속에 든 것으로 어떻게든 이런 것 저런 것을 만들어 먹으며 버틴다는 뜻이다. 요즘의 내 생활도 비슷하다. 내 시간은 아직도 2022년 4월 초 그 언저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냥 그 무렵 어딘가에서 멈추어 선 채, 하염없이 과거만 파먹으며 살고 있는 기분이다.


그런 식으로 과거를 파먹던 중에 몇 년 전 쓰다가 놓아버리고 비공개로 돌려놓은 블로그에 다시 접속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언제쯤 이 끔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어이가 없어서 나는 한참 동안 모니터 위로 떠오른 그 배불러 터진 소리를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고 있었다. 저 무렵의 나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고 불만이어서 저런 볼멘소리를 써댔을까. 뭐가 끔찍한 건지 알지도 못했으면서. 저 글을 쓸 무렵의 그는 건강했다. 당시의 나에게 네 옆의 그 사람이 몇 년 후 어느 날 이런 식으로 네 곁을 떠나간다는 말을 한다면 차라리 나더러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말을 믿으라고 할 것이다. 물론 저 당시의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경제적인 문제가 전혀 없는 집은 보통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떠오르는 몇몇 문제들만 해도 그때 참 사는 게 피곤했고 힘들었다는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랐다. 그러나 결국 다 배부른 투정에 지나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그때의 나를 괴롭히는 것들은 적어도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그의 부재처럼,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문제들이 아니라. 나는 고작 그런 걸로 저런 세상 다 산 푸념을 블로그에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바닥인가 하면 지하 1층이 있고, 또 여기가 바닥인가 하면 지하 2층이 있는 것이 인생이라더니, 그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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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예전에 들은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경우가 가끔 있다. 내게는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어느 해 수능시험날 새벽 故 신해철 님이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에서 한 멘트이다. 오늘 시험을 망쳤거나 기대한 만큼 잘 보지 못해서 실망하고 계신 분들, 내가 장담하는데 오늘 본 수능 성적 따위는 10년 안에 당신 인생의 주요 사건 top 10 안에 명함도 못 내밀게 될 테니 필요 이상으로 절망하지 말라는, 뭐 그런 말이었다. 그 말대로다. 저 블로그 글을 쓰던 무렵 겪었던 일들은 이젠 내 인생의 주요 사건 top 10은커녕 top 100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내가 앞으로 몇 년이나,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남은 인생을 살면서 또 어떤 기막히고 가슴 아픈 일을 또 당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상실과 부재의 시간보다 더한 일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 나는 가끔 한다.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생긴다면 그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일일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지금 나는 내 인생의 저점을 통과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주 느리고 고통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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