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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Nov 29. 2022

많이 컸다, 대한민국

-230

어제 경기는 아쉬웠다. 후반의 기세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전반전에 그렇게 쉽게 실점하지만 않았더라면. 동점을 만들고 난 후에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하룻밤 자고 일어난 지금까지도 가루약을 털어먹고 난 뒤처럼 입 속에 씁쓸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나는 98년도 월드컵에서의 네덜란드와의 경기를 떠올린다.


나는 그 경기를 다 보지 못했다. 당시 우리 집의 채널 선택권은 아버지에게 있었고, 전반전에만 두 골을 먹은 것도 모자라 후반전이 절반쯤 지나갔을 때 세 번째 골을 실점하는 것을 본 아버지는 버럭 역정을 내며 '졌다! 졌어!'를 부르짖듯 외치시더니 텔레비전을 꺼 버리고는 너도 들어가 자라며 나를 내 방으로 쫓아냈기 때문이다. 내 눈으로 본 스코어만 3대 0이었고 거기서만 끝났어도 완패였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텔레비전에서는 그러고도 두 골을 더 먹고 한 골도 따라가지 못해 최종 스코어가 5대 0으로 대패했다는 참담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축구 잘하는 나라라는 건 저렇게나 무섭구나, 하는 실감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했던 것 같다. 무슨 일에든 책임질 사람을 찾기 좋아하는 언론은 이 참담한 패배의 희생양으로 당시의 감독을 지목했고 그는 대회를 끝마치지도 못한 채 중도에 경질되어 압송이라도 당하는 죄인처럼 귀국해야만 했었다. 그 패배가 물론 대단히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아직도 가끔 한다.


그게 벌써 24년 전의 일이다. 어찌 보면 24년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월드컵 대회의 연차로는 고작 여섯 대회 전에, 대한민국 축구에는 그런 일도 있었다.


상대팀이 우리 골문에 다섯 골이나 퍼붓는 동안 한 골도 따라가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던 한국 축구는 2점을 실점하고도 2점을 따라가는 축구가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야 대한민국 이제 뽈 좀 찬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예전 월드컵에서의 한국은, 그냥 소위 말하는 '승점 자판기'였다. 한국에게서 승점을 따 가지 못하면 16강에는 갈 수 없는 그런 팀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니까. 늘 그 자리에 그렇게 머물러 있는 것 같아도, 세상은 그런 식으로 조금씩 발전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98 월드컵에서의 그 끔찍했던 대패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따로 있다. 네덜란드 팀의 감독 말이다. 3대 0 정도 했으면 대충 할 법도 한데, 그걸 악착같이 달려들어 무슨 부관참시라도 하듯 기어이 5대 0씩이나 만들어버렸던 그 냉정한 감독. 그는 불과 4년 후 한국의 감독으로 변신해 그야말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런 걸 보면 참 사람 인생 한 치 앞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월드컵 경기는 대개 1차전은 약간 아쉽고, 2차전에서 고전하고, 3차전에서 좋은 결과를 맺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남은 3차전은 또 어떻게든 잘하지 않을까 하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예측을 해 본다. 그리고 이건 꽤 오랫동안 축구를 봐 온 그의 예측이기도 할 것 같다는 억지를 부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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