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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03. 2022

인생은 임기응변, 혹은 벼락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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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이후 오늘 가장 늦게 잠에서 깼다. 그럴 만도 하다. 어제 새벽 네 시도 넘어서 잠들었으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그러하셨을 것처럼.


며칠 전 브런치에도 쓴 것 같은데, 한국의 월드컵은 언제나 조별 리그 3차전 경기가 '찐'이다. 98년에는 바로 전 경기를 5대 0으로 대패해 놓고도 몇몇 선수가 피 철철 흐르는 머리를 붕대로 싸매가며 달려들어서 무승부를 따냈고 2002년에는 지금껏 내가 본 우리나라의 월드컵 골들 중에 가장 멋진 골이었던 박지성의 결승골이 터졌다. 그렇게까지 멀리 갈 거나 있나. 바로 전 월드컵 때, 우리나라는 3차전에서 당시 피파 랭킹 1위이던 독일을 상대로 두 골을 넣고 이겼다. 그래서 어제 경기도 왠지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다만 우리나라의 상황이, 우리만 잘한다고 그걸로 결정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게 신경 쓰였을 뿐. 상기한 바로 전 월드컵 때 그랬다. 우리나라는 온 세계의 언론들이 다 난리를 칠 정도의 대형사고를 쳐놓고도 다른 경기 결과에 발목이 잡혀 16강에 가지 못했었다.


시작하자마자 한 골을 먹고, 그래도 주눅 들지 않고 꿋꿋이 동점을 만들고 경기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기어이 역전해내는 모습은 참 장하고 뿌듯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경기를 마쳐놓고도 마음껏 기뻐하지도 못하고 다른 구장의 결과를 지켜보는 기분은 참 피가 말랐다. 우리나라의 경기 90분보다 남의 경기 인저리타임 7분 남짓이 더 길었던 건, 아마 나만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그 피 말리는 시간 끝에 16강이 확정되고, 20년 전 그 때나 봤던 슬라이딩 세레모니를 다시 하는 우리 선수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리고, 이제 내게는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같이 떠들고 즐거워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흥분과 설렘에 잠은 오지 않고, 그러나 그 감정을 같이 나눌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냥 자리에 누운 채 핸드폰으로 포털사이트에 올라오는 대동소이한 뉴스들을 끊임없이 리프레시하며 새벽을 보내다가 잠이 들었다.


지금 텔레비전에는 어제 보지 않은 다른 방송국 버전의 중계 재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긴 경기의 재방송은 언제 봐도, 몇 번을 봐도 즐겁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오늘 하루는 온 방송국에서 알아서 재탕삼탕을 해줄 테니 나는 그걸 열심히 따라다니며 받아먹기만 하면 될 테다.


아직도 그가 없는 하루하루는 모든 것이 처음이고 낯설어서, 나는 그때마다 당황해 몸을 움츠리게 된다. 힘들거나 슬픈 일뿐만이 아니라 좋은 일에도 그렇다는 것을 나는 어제 새벽에 배웠다. 그러나 뭐, 인생은 어차피 임기응변 혹은 벼락치기다. 뭐든 부딪혀보기 전엔 알 수 없고, 막상 부딪히면 또 어떻게든 되게 마련인 거겠지. 한국의 월드컵이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이.


늦게 아침에 할 일을 마치고 창밖을 내다보니 간밤에 눈이 조금 왔었나 보다. 그러나 내가 내리는 걸 못 봤으니, 올해 우리 동네의 첫눈은 아직 오지 않은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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