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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31. 2022

12월 32일

-262

오늘 아침엔, 그냥 이 노래가 생각나 몇 번이고 들었다.


내 경우엔 12월 32일은 아니고, 4월 8일이다. 나는 벌써 267번째 4월 8일을 살고 있다. 바깥에 단풍이 들고 눈이 내려도, 기온이 영하 10도가 넘게 떨어져도 그날 멎어버린 내 시계는 아직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던가 하는 말이 있는데 그럼 이런 식으로 넉 달을 더 버텨서 다시 4월이 오면 그땐 내 시계도 맞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한다.


요즘의 나는, 그래도 지난봄에 비해 잘 지내는 편이다. 먹고 싶은 것도 많아졌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졌다. 책상 위에 놓인 그의 사진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짜는 시간도 많이 줄었다. 아예 없어지진 않았지만, 그것까지는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가끔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 뭔가를 보다가 손뼉을 치며 웃기도 한다. 그러다가 책상 위 그의 액자와 눈이 마주치고 머쓱해진다. 당신이 떠나간 지 8년도 아니고 8개월밖에 안 됐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빨리 멀쩡해진 나를 보고 당신이 혹 서운하진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한다.


나는 아직도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커다란 목소리로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들고나갔던 가방을 풀면서 예전의 그에게 그랬듯이 열심히 주절거린다. 정신줄 놓고 있다가 버스를 잘못 타서 한참을 돌아갔다는 이야기, 원래 마트에 들러서 뭘 좀 사 왔어야 했는데 춥고 귀찮아서 그냥 왔다는 이야기, 집 앞 골목에 프랜차이즈 카페가 생겼더라는 이야기, 우리가 몇 번 사다 먹은 통닭집이 결국은 문을 닫았더라는 이야기, 버스카드 충전 좀 하려는데 동네 ATM 기계들이 전부 고장 나서 편의점을 네 군데나 들렀다는 그런 이야기들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언제쯤까지 그럴 건지, 그럴 수 있을 건지, 그러지 않고도 견딜 수 있을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제는 올 한 해 신세를 졌던 단골 꽃집에 가서 올해 마지막 꽃을 사 왔다. 자줏빛이 나는, 마치 날개를 펼친 나비처럼 생긴 꽃으로, 이름은 '석죽'이라고 한다. 무협지를 읽다 보면 아름다운 여주인공의 미모를 비유하는데 종종 쓰이는 꽃인데 이런 식으로 실물을 영접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한동안 그의 책상을 차지하고 있던 연분홍빛 장미를 내 자리로 치우고 그 자리에 자줏빛 석죽을 놓았다. 내가 그를 위해 산 서른네 번째 꽃이다. 이왕 이럴 거라면 그가 떠나기 전에, 서른네 번이 아니라 세 번이라도 꽃 좀 사줄 걸 하는 때늦은 후회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재미나고 유익한 읽을거리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이른 아침부터 청승스러운 글이나 올리는 이 브런치에 들러 마음을 남겨주신 모든 독자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늘 하는 당부의 말씀을 드린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실컷, 아낌없이 사랑하시라고. 가끔 미워도 너무 많이 미워하지는 마시라고. 도저히 미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미우면, 돌이킬 수 있을 만큼만 미워하시라고. 내년에도, 그 내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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