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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an 21. 2023

그래서 글씨 좀 나아졌어요?

-283

작년 5월에, 텅텅 비어버린 하루를 어떻게든 메꾸기 위해 펜글씨를 시작하면서 나는 40페이지짜리 클리어파일 한 권을 샀다. 나는 매일 A4 다섯 장 분량(그래봐야 글자가 워낙 커서 실제로 쓰는 건 한 페이지당 천 자 내외가 아닐까 생각한다)의 펜글씨를 쓰는데 그중 네 장은 버리고 한 장은 클리어파일에 끼워놓는다. 그렇게 일주일 치를 한 페이지에 넣는다. 이걸 모아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이 힘겨운 시기에 내가 버텨낸 흔적 같은 것이라 그렇게 모아놓고 있다.


요즘 그 클리어파일은 한 손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들기도 힘들 만큼 무거워졌다. 아무 생각 없이 파일을 꺼내 들다가 그 무게에 어어어 하며 다른 손을 가져다 받히는 일도 종종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럼직하다. 40페이지짜리 클리어파일은 이제 38페이지가 꽉꽉 차고, 빈 페이지는 두 장만 남았다. A4 용지가 얼추 250장도 넘게 꽂혀 있는 셈이니 어지간한 복사지 한 묶음 정도의 무게와 비슷할 테니까. 쓴 것들의 5분의 1만 모아놓은 것이 이 정도니 그간 내가 글씨를 쓴 종이들은 이것의 네 배가 더 있을 것이다,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스스로가 좀 대견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38주 동안 하루에 다섯 장씩 펜글씨를 써서, 글씨는 좀 나아졌느냐.


이건 또 선뜻 그렇다고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인가 하면 그건 확신할 수 없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서는 나아졌다. 가끔 일 때문에 전화통화를 하다가 상대방이 불러주는 뭔가를 다급하게 메모하면서, 나는 그래도 내 글자가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반듯해졌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손으로 뭔가를 써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예전만큼 스트레스를 받진 않는다. 그건 내가 글씨를 교정하는 데 쏟은 38주의 시간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력하고 있으니까 예전보단 뭐가 나아져도 나아졌을 거라고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다분히 심리적인 것들을 빼고 실제의 내 글씨가 얼마나 좋아졌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지수다. 예전에 비해 조금 나아졌을 뿐, 내 글씨는 입에 발린 말로라도 예쁘다거나 보기 좋다거나 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물론 이건 내가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이, 그냥 나 혼자서 프린트한 폰트를 따라 글씨를 쓰는 수준의 연습만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뭔가가 비약적으로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는다. 예전의 나라면 글씨를 교정하는 데 38주나 시간을 들였다고 하면 지금쯤엔 김정희나 한석봉 같은 글씨를 가져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해 본 결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글씨란 그 사람의 습관이고 성격이다. 40년 넘게 쌓아온 버릇을 뜯어고치기에 38주라는 시간은 턱없이 짧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40 페이지짜리 클리어파일 한 권을 다 채우고 다음 권을 다 채워갈 때쯤에는, 글씨가 좀 나아진 정도가 아니라 좀 예뻐져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세상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빠지는 것에도, 좋아지는 것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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