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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an 29. 2023

주마등

-291

어제 오전이었다. 주기적으로 광고 알림을 보내 오는 집 근처 마트에서 알림을 보내왔다. 시큰둥하게 오늘은 뭘 싸게 파나 하고 죽죽 훌어내리다가 구미에 당기는 품목을 몇 가지 발견했다. 그렇잖아도 집에만 있어서 좀이 쑤시던 차, 체감 온도가 영하 20도 가까이 떨어지던 고비는 이제 가까스로 피해 간 모양이니 간만에 바람도 쐴 겸 마트나 다녀오자. 뭐 그 정도의 생각으로 가볍게 집을 나섰다.


늘 그렇듯 막상 마트에 가 보면 이것도 사야 하고 저것도 사야 해서 예상보다 만 원 가까이 추가지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날씨가 조금 풀렸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춥긴 해서 마스크 속에 찬 습기가 고스란히 얼어버린 듯이 느껴졌다. 얼른 집에 가서 사온 것들을 풀어놓고 점심 먹어야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덜컹,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엘리베이터가 멎었다.


처음엔 딴 생각을 하는 틈에 엘리베이터가 다 올라온 줄 알고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께닫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등수를 표시하는 액정은 4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움직이는 기척이 전혀 없었다. 층수를 눌러두었던 버튼엔 불이 꺼져 있었다. 다시 한 번 눌러 보았지만 버튼에는 다시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오싹한 기분에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엘리베이터에 갇힌다는 건가.


엘리베이터는 '밀폐'되어 있는 공간이 아니며, 그래서 산소 부족이라거나 하는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긴 했지만 그런 건 이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일단 비상벨을 눌렀다. 그 벨을 누르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오늘은 하필 토요일이고, 아주 재수가 없으면 응답하는 사람이 없거나 있더라도 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가 그냥 멎기만 한 거라면 차라리 다행인데, 여기서 떨어진다거나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순간 그야말로 수천 가지쯤 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일들, 앞으로 살아가려고 생각했던 것들, 내가 미처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들, 몇몇 사람들의 얼굴, 그리고 지금은 채 기억나지도 않는 수많은 일들. 나는 내 머리가 동시에 그렇게나 많은 연산을 처리할 수 있는지 어제 처음 알았다. 그런 걸 아마 사람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본다는 주마등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그런 걸 경험했다.


잠시 후 비상벨 저 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침착하게 주소를 대고 상황을 설명했다고 생각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랬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는 동안, 4층과 5층의 중간 어딘가에 멎어있던 엘리베이터는 용케 4층으로 다시 내려가더니 인심이라도 쓰듯 문을 열었다. 나는 허둥지둥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거기서부터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비상계단을 따라 집보다 두어 층이나 더 높이 올라와 있었다. 엘리베이터 속에 걷혀 있었던 시간은 암만 생각해도 1분이 넘었을 리가 없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충격이 꽤나 컸던지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사는 게 내 마음 같지 않은 순간에, 혼자 남은 일상이 너무나 외롭고 쓸쓸할 때 나는 가끔 좋은 데 혼자만 가 있지 말고 나도 좀 데려가라고 그를 향해 칭얼거리곤 한다. 그러나 그 말은 과연 얼마만큼 진심일까. 정말로 '그가 나를 데려가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정말로 초연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따라나설 수 있을까.


새삼 미안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무섭고 외로운 순간을 혼자 맞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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