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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Feb 06. 2023

결국, 슬램덩크 3

-299

지금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의 슬램덩크 '최애'가 누구였는지 모른다. 명확하게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서다. 그는 성격으로는 강백호를 많이 닮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송태섭과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둘 중 하나가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생각해 볼 뿐이다. 고지식한 바른생활 사나이인 채치수였을 것 같지는 않고, 대놓은 여심 저격 캐릭터인 서태웅이었을 것 같지도 않다. 싸움질하고 다니느라 고등학교 2학년을 1년 통째 날려먹은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니 의외로 정대만일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나의 슬램덩크 최애캐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정대만이었다. 그거 좀 의외인데? 하고 그는 물은 적이 있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서태웅 좋아하지 않나? 여자들이 다 잘생기고 말없는 '멋있는' 캐릭터만 좋아한다는 편견을 버리라고 대꾸해 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왜. 정대만도 멋있잖아. 자기가 잘못한 거 단번에 인정하고 깨끗하게 승복하잖아. 그거 아무나 못해. 그건 그렇다고 그도 납득했었다.


그래서 나는 20년도 넘은 시간 만에, 무려 극장 스크린 위에서 예전에 좋아하던 그 캐릭터를 다시 만났다.


나는 나이를 먹었지만 그 화면 속의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네들은 아직도 풋풋한 청춘이었고, 잘못해도 실수해도 다 괜찮은 소년들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뭐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불가사의한 미래가 펼쳐져 있었고 이제부터 그 미래를 향해 한 발 한 발 딛는 모든 걸음이 그들의 역사가 될 참이었다. 그들이 겪고 있는 시련과 아픔마저도 그 반짝이는 순간을 위한 작은 장식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순전한 부러움도 순도 높은 감탄만도 아닌 그 모든 것들이 뒤섞인 감정에다가, 한참 저 만화를 좋아하던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하는 회한에 지금은 곁에 없는 사람의 존재마저 한데 뒤섞여 심장을 아프게 짓눌렀다. 그래서 이번의 슬램덩크는 내게는 참 여러 가지로 아픈 영화였다.


극장을 나서면서 본 나와 같은 시간대에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중년이 의외로 많았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때 그 시절에 슬램덩크를 좋아했던 게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니니까. 인터넷에도 심심치 않게 엄마가, 아빠가 슬램덩크를 알고 있더라는, 심지어 나보다 더 잘 알더라는 젊은 친구들의 글이 올라오니까. 스크린 속의 정대만은 아직도 열여덟의 소년이지만 현실의 정대만은 그보다도 두 살이나 나이가 많댔으니 이제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든 중년일 것이다. 그에게도 코트 밖의 삶은 힘겨울까.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삶이 힘겹지 않은 사람 따위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는 열여덟 살 무렵의 저 타오르는 불꽃같았던 순간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그럼 나는. 내게는 과연 저런 순간들이 없었을까. 그냥 잠시 잊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잊어버린 지가 너무 오래돼서 다시 끄집어내는 데만도 한참이나 시간이 걸리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영화가 끝난 시간은 밤 10시도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버스가 있긴 한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유튜브를 뒤져 wands의 世界が終るまでは를 찾아 들었다. 이번 극장판의 오프닝과 엔딩곡들도 좋았지만, 아직도 내게는 슬램덩크를 상징하는 노래로 남아있는 곡이다.


막차 끊어졌으면 뭐 어때. 집까지 걸어가면 되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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