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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Feb 08. 2023

수고가 많으십니다

-301

정확히 어제 아침부터 보일러가 말썽이다. 뜬금없이 물보충 램프에 불이 들어오더니만 어제는 하루 종일 온수를 틀 때마다 윙윙대는 굉음이 나고 물이 맺혀 뚝뚝 떨어지기를 반복하더니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숫제 연소 램프가 깜빡거리고 있다. 방바닥은 냉골이고 온수를 틀어도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이럴 땐 일단 필터 청소를 해 보는 거라고 해서 목장갑까지 끼고 달려들었지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끼어버린 건지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필터가 빠지지 않았다. 이쯤에서 헛심을 그만 쓰고 얌전히 사람을 부르기로 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카톡으로 편리하게 as 접수를 해놓고, 나는 조금 안달이 났다. 그래서 기사는 언제쯤 온다는지, 수리비는 또 얼마나 나온다는 건지,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요행히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우습게 찍던 그때 퍼지지 않아 준 것은 참 대단히 고마운 일이지만 오늘도 찬물에 손을 넣고 이것저것 하기에는 대단히 부적절한 날씨라는 점에서는 뭐 별로 큰 차이도 없다. 점심 설거지 어떡하지. 오늘 빨래도 해야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그냥 전화를 해서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도대체 우리 집엔 언제쯤 기사님을 보내줄 예정이냐고.


아홉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어서 전화연결이 안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지금은 근무시간이 아니라는 메시지 대신 통화량이 많아 연결 시간이 다소 소요될 수 있다는 안내가 나왔다. 지금도 근무하는 건가. 하기야 겨울이니까. 겨울에 보일러 고장은 중요한 문제니까. 제가 제 조급증을 못 이겨 아홉 시도 되기 전에 전화를 걸어놓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화 연결까지는 3, 4분쯤이 걸렸던 것 같다. 늘 하던 대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는 인사부터 했다. 이건 뭐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도 아니고 정말로 내가 그 얼굴 모를 상담사가 너무나 고마워서 한 말도 아니었다. 그냥 길을 가다가 얼굴을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를 하는 딱 그 정도의 감각이었다. 그러나 듣는 사람에게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핸드폰 너머의 전화받는 감이 급격히 멀어지더니. 잠시 후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고객님 감사합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일로 통화하게 되는 상담사들 특유의 안정되고 매끄러운 목소리는 분명 아니었다. 어쩐지 나는 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아홉 시 이후부터 배정된 기사님들이 전화를 드려 방문 일정을 잡을 것이고 통상 접수 후 한 시간 정도가 걸리지만 접수 건이 많을 경우 두세 시간 정도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 들으나마나 한 안내를 듣고 나는 알겠습니다 하는 대답을 하고 얌전히 전화를 끊었다.


오늘 내 전화를 받은 그분의 근무시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침 일찍 시작했을 수도 있고 어젯밤을 꼬박 새고 이제 교대를 앞두고 있는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굴 모르는 사람의 무미건조한 수고한다는 인사에 잠시 울컥할 만큼, 그분의 오늘 하루도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모두들 힘내셨으면 좋겠다. 오늘 내 전화를 받아주신 그 상담사님도, 때아닌 보일러의 파업에 졸지에 냉방에서 덜덜 떠는 신세가 된 나도,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모든 독자님들도. 모두모두 살아가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정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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