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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Feb 09. 2023

우리 참 미련했구나

-302

이틀에 걸쳐 일어난 느닷없는 '보일러의 난'은 결국 수리 정도 선에서 끝나지 못하고 교체라는 극약처방으로 막을 내렸다.


점심시간 가까이가 되어서야 겨우 전화통화가 된 서비스 기사님은 증상을 듣고 보일러 모델명을 듣더니 그거 못 고친다고 아주 딱 잘라 말했다. 부속이 없어요, 부속이. 그거 바꾸셔야 돼요.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했더니 몇 달 전 텔레비전이 갑자기 켜지지 않게 되었을 때 듣던 말과도 비슷했다. 어쩐지 몹시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이렇게 또 예상치 못한 목돈이 나가는구나. 도대체 작년부터 텔레비전에 모니터에 이제는 보일러까지, 왜 이렇게 돌아가면서 나를 애먹이는 걸까.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한탄뿐이었다. 일개 소비자에 불과한 내가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기사님에게 출장 요청을 드렸다.


기사님은 오후 네 시쯤 오셨다. 설치를 허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쌓여있는 보일러실을 치워야 했다. 더럭 짜증이 났다. 내심 설치가 아니라 수리 정도로 끝나기를 빌었던 건 이런 후폭풍이 있을 걸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말없이 탈없이 잘 좀 돌아가주면 좋을 걸, 꼭 이런 식으로 애를 먹인다는 내 투덜거림에 오히려 기사님이 정색을 했다. 이 보일러 엄청 오래된 물건이에요. 여기 시공연도 보이시죠. 2006년이잖아요. 은퇴시기 놓쳐도 한참 놓쳤어요. 농담이 아니고 이젠 부속이 없어서 고치지도 못해요. 이만하면 제 수명 넘어까지 잘 쓰신 거예요. 2006년이라. 그게 도대체 언제던가. 그게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인지, 내가 몇 살 때였는지 얼른 셈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아마 서울에서 창업 비슷한 하고, 그 끝이 안 보이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져 슬금슬금 지쳐가고 있을 그 무렵이었나 보다. 내가 백만 년쯤 전에 일어난 것 같은 그 시절을 살고 있을 때 이 보일러는 이 집에 들어와 벽면에 자리를 잡았고, 그저께까지 나를 이 추위에서 지켜주기 위해 나름 애를 쓰다가 수명이 다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짠한 기분도 들었다.


설치 자체는 예상보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벽에 달린 컨트롤러까지를 설치해 주고 간단한 설명을 해 준 후 기사님은 돌아갔다. 신형이라 에너지 효율 같은 건 원래 쓰던 거에 비교할 게 못 돼요. 가스비도 아마 한 10프로는 적게 나올 겁니다. 그런 말을 들었다.


남은 정리는 나의 몫이었다. 창문을 열고 청소기를 돌리고 바닥을 닦았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집안이 훨씬 따뜻해진 기분이었고 씻을 때 갑자기 찬물이 쏟아지는 증상은 거의 없어졌다. 역시 돈이 좋은 게, 쓰고 나면 뭐가 좋아져도 좋아진다고 그는 말했었다. 그러게. 돈 들여 바꿔놓으니 이런 건 좋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오빠 있을 때 바꿀 걸 그랬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랬으면 그 숱한 겨울도 조금 더 따뜻하게 보냈을 텐데. 씻다가 갑자기 찬물이 쏟아져서 흠칫흠칫 놀라는 일도 없었을 텐데. 우리가 참 퍽이나 미련했구나 하고.


이렇게 집안의 세간이 야금야금 바뀌어서야 그가 어느 날 불쑥 나를 찾아와도 우리 집을 못 알아보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물론 그 사람이 보일러를 보고, 텔레비전을 보고,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우리 집을 찾아올 리는 없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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